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닫았다.
어둠을 뒤집어쓴 채 생애라는 낯선 말을 되새김질하며 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집은 조금씩 좁아졌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물속에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있는 힘껏 외로움을 참아야 했다.
간혹 누군가 창을 두드릴 때마다 등이 가려웠지만.
위로가 되지 못하는 머리가 아팠다.
똑바로 누워 다리를 뻗었다.
사방이 열려 있었으나 나갈 마음은 없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아직 더 잠겨 있어야 했다.
단단한 껍질로 둥그스름 감싸인 달걀, 유정란이라면 그 안에 한 점 생명의 씨앗이 점도(粘度) 높은 양수에 잠겨 있다. 그 생명 다 자라 스스로 깨고 나올 때까지 달걀 껍데기는 문 없는 벽, 바깥세상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 정도로 화자는 세상에 벽을 치고 통로를 차단했단다. 왜냐?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란다. 진작 부화해서 세상을 살아온 새가 달걀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정도로 화자는 자기의 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달리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나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화자는 착하지 않게 살았다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멋진 몸매를 ‘착한 몸매’라 하는 요즘 세상에 ‘착하다’는 말은 ‘세상 입맛에 맞는’이라 해석해도 좋을 테다.
무슨 일로인지 크게 상처받은 화자는 ‘다 싫다, 싫어!’, 보호벽을 치듯 세상과 연을 끊고 숨어든 듯하다. 그 완벽하게 혼자 있는 시간에 자기의 살아온 날들을 되새겼을 것이다. 기질이 곱고 약한 듯한 화자는 필경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렸을 테다. 일이 잘못되면 항상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설령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도 내가 잘못해서, 내가 모자라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화를 내야 할 때 자책하는 것, 성인(聖人)이나 폐인(廢人)으로 가는 길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