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2〉야당정치인 거듭나기
1995년 2월 24일 민주당 전당대회. DJ는 이종찬(왼쪽), 김근태(오른쪽)를 이기택 총재(가운데)의 민주당에 합류시켰지만 그가 기대했던 야권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특히 당시 가장 지명도가 높고, 호감도가 높은 정치인이었던 박찬종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동아일보 DB
“지난번 대선에서 도와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보다 이 의원과 인연을 맺어 좋은 정치를 할까 했는데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특별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김영삼 씨가 보복할까봐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도 그분에게 ‘야당이 단결해야 YS(김영삼)가 집권하더라도 견제가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정치를 계속할 의지도 없는 것 같고….”
“이 의원, 그 사람은 기업인이고 재벌입니다. 재벌이란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과 야당을 어떻게 같이합니까.”
그의 말에는 내가 국민당과 합당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의미가 섞여 있었다.
“내가 정치를 오래 한 사람으로서 이 의원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할 터이니 들어보시오. 이 의원은 성질이 모질지 못한 것이 흠이오. 정치인은 자기 주견을 뚜렷하게 세우고 모든 결정을 거기에 맞추어 강하게 밀고나가야 합니다.”
크게 한 방 맞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쓴 약이 필요했다.
DJ는 1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떠났다.
이듬해 6월 나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길에 영국에 들렀다. 영국에는 마침 런던정경대(LSE)에 유학 중인 아들 철우가 있었다. 얼마 전 DJ가 런던에 강연차 왔을 때 인사했더니 “아버지는 언제 영국에 오시느냐?”면서 연락처를 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YS가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 총재님도 한번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현실정치에서 떠났습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이 기대하고 있는데 재기하셔야지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여당에서 여당으로의 정권교체는 정착된 것 같습니다. 이제 여당에서 야당으로 교체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DJ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나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뜻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야권의 단결이 선결과제이지요. 내가 이기택 총재에게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야권통합을 위해 한 가지 충고하자면 박찬종과 김근태도 포함시키도록 하세요.”
이 말을 들으며 나는 DJ가 언젠가는 정계에 복귀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해 말 DJ가 귀국했다. 이제 소나기가 그쳤다고 본 것이었을까? DJ는 벌써 1995년 지방선거에서 당내 기반을 확고히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어느 날 DJ가 권노갑과 나를 불렀다. 김영삼 정권에서 물러난 이회창 전 총리와 조순 전 부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한번 생각해보자고 했다.
“이 의원은 그분들과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분들의 의향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한번 접촉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회창은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그래도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인데 서울시장에 어떻게 나갑니까?”
조순 전 부총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대중 총재께서 그런 배려를 하신다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자세히 생각하시고 나에게 귀추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방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DJ는 나와 김근태에게 더이상 시간을 끌면 야권통합이 어렵겠다며 양대 세력만이라도 민주당과 합치자고 제의했다. 야권통합을 위해 근 2년을 노력했으나 사실 진척이 없었다.
나는 새한국당에 남아 있는 장경우, 오유방, 이영일, 김현욱, 홍성우 등의 동지들과 의논했다. 김현욱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선기간 중에도 국민당보다 민주당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론을 주장했던 분들이라 모험을 해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하여 민주당은 새한국당과 재야세력만 영입하는 모양으로 1995년 2월 24일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첫날부터 이기택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의 입당 수락 연설은 짧았지만 오히려 당원들의 박수와 지지를 더 많이 받았다.
“당원 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업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평적 정권교체입니다. 전두환 씨가 노태우 씨에게, 노태우 씨가 김영삼 씨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과 같은 수직적 정권교체는 진정한 정권교체가 아닙니다.”
그날 김상현 의원은 나에게 “오늘 전당대회는 완전히 ‘이종찬 대회’가 되었구먼. 당장 총재선거에 들어갔다면 이기택은 아마 낙방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입당 후 나의 1차적인 목표는 당내 위상이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1995년 지자체선거, 96년 국회의원선거, 그리고 9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이 연전연승하는 길을 찾아 김영삼 정권을 올바르게 심판하는 데 있었다.
▼ 경기지사 선거와 DJ의 정계복귀 ▼
서울 조순-경기 이종찬 후보구도 급부상
이기택 “DJ 정계복귀 시나리오다” 반발
1995년 2월 이종찬 새한국당이 이기택 민주당과 합당한 직후 어느 날, 장경우 의원이 이종찬 민주당 상임고문을 찾아와 경기지사 선거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종찬은 경기고 후배이기도 한 장경우에게 마음의 빚이 적지 않았다.
이종찬은 곧바로 이기택 총재를 만났다.
“장경우 의원은 경기도 토박이고 선거구도 안산·옹진이라 경쟁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군은 또 이 총재의 고려대 후배이고 인재입니다. 후배를 키운다는 뜻에서도 한번 밀어주십시오.”
이종찬은 일부러 ‘고려대 후배’라는 점을 강조했다. 혹시 자기 사람 심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당내에 제정구, 문희상 등 잠재적인 경쟁자가 많습니다. 여러 각도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4월 들어 제정구 의원 그룹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의외로 이종찬이 가장 강세로 나왔다. DJ(김대중)는 ‘서울의 조순, 경기의 이종찬’을 환상의 구도로 생각했다. 이강래 비서를 시켜 이종찬의 ‘경기도 뿌리’까지 조사시켰다.
이종찬은 곤란해졌다.
“선생님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얼마 전에 제가 이기택 총재에게 장경우를 추천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바뀌면 제가 먼저 이 총재에게 지난번 장경우 추천 건을 거둬들이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내에서 의견일치로 저를 민다면 나가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잘됐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 총재에게 누가 말을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이기택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이거 동교동의 생각이지요?”
“아니, 동교동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나도 여러 데이터를 종합해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은 김대중의 정계복귀 시나리오입니다.”
4월 27일 장경우는 경기지사 출마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이종찬의 기억. “그는 사전에 나와 한마디도 의논하지 않았다. 이미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DJ는 장경우를 직접 불렀다. “이번에 양보하면 앞으로의 진로는 내가 보장하겠소.”
그러나 이기택과 장경우는 뜻을 꺾지 않았고, 장경우는 결국 동교동계의 안동선 의원과 치열한 경선을 벌인 끝에 후보로 확정된다.
DJ는 그래도 기대를 접지 않았다. 6월 5일 이기택이 ‘장경우 지원’을 부탁하러 찾아오자 DJ는 이렇게 호소했다. “지자체 선거에서 이기면 그 영광은 이 총재의 것이지 정계를 은퇴한 내가 영광을 차지하겠소?”
민자당은 선거에서 참패했지만, 경기지사 선거에서만큼은 이인제 후보가 장경우 후보를 10%포인트 차 이상으로 대승했다.
지금도 의문이다. 만약 이기택이 DJ의 뜻을 받아들여 이종찬이 출마하고, 민주당이 서울에 이어 경기지사 선거까지 승리했다면 그 ‘영광’은 정말 이기택 총재에게 돌아갔을까? 이종찬은 “그냥 가정이지만, 그랬다면 DJ는 정계에 복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 [바로잡습니다]3월 28일자 회고록 관련 ▼
지난주 회고록에서 인용한 공자의 ‘민불신불립(民不信不立)’이란 말은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 맞습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