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끼리라서 얘기가 잘 통하겠거니 기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전셋값 협상을 아내에게 떠넘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 여자와 통화를 했던 아내가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남편의 가정경제 운용계획에 비상이 걸렸다. 집주인은 최고시세로 올려 달라고 요구해 왔다. ‘나가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남편은 “무시당했다”고 흥분한 아내를 구슬려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별다른 말이 오간 것도 아니었다. “올려 달라”와 “사정을 감안해 달라”는 정도였다. 그러다 아내가 “전셋값이 그 정도면 차라리 사는 게 낫겠다”고 한 게 도화선이 됐다.
남편은 아내의 그런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세계약은 말 그대로 거래일 뿐인데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다고 상대와 감정싸움을 벌이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원하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계약 안 하면 그만이다. 화났다고 최고시세를 들먹이는 집주인 여자는 또 뭔가.
한데 아내가 툭하면 화부터 내는 다혈질인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남편과 말다툼을 벌일 때에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따져가며 코너로 모는 스타일이다. 그런 아내가 왜 다른 여자 앞에서는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뇌과학을 통해 그 이유 중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성은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약해 말과 감정을 동시에 다루는 데 서투르다. 남자가 사과를 해도 여자 입장에선 어쩐지 진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놓고 협상을 벌일 때에는 이런 부분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상대가 감정을 자극해도 오로지 이익에만 집중하며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여성은 말과 감정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데 능하다. 자기 정서를 잘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상대의 정서를 자극하는 뜻을 교묘하게 전할 수 있다. 애매한 말로 자존심을 은근히 건드리는 것이다.
“그 여자 싫어.” 아내의 이런 감정 토로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다.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