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휘종이라면 중국 송나라의 그 유명한 제8대 황제를 말하는 건가. 민정(民政)은 몰라라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다 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지. 한 남성의 못된 행각이 줄줄이 드러나서 그를 지탄하는 말로 세상이 떠들썩해도 누군가 안타까이 중얼거릴 수 있으리. ‘나한테는 참 좋은 오빠였어요.’ 휘종은 황제로서는 무능하고 괘씸한 자였지만 궁정 서화가(書畵家)를 양성하는 등 문화예술 애호가이자 수호자였으며 오늘날에도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화가’라고 평가받는 예술가다. ‘예술밖엔 난 몰라’ 하는 황제가 예술가들에게는 참 좋은 오빠이려나…. 그리 생각하고 태평성대를 누린 예술가도 많을 테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은’ 예술가도 적지 않을 테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이 구절에서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에둘러서 표현하곤 했던, 검열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는 건 지나치려나.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당신을 그리려고 이런저런 맥락을 찾다 보니 내가 그려졌단다. 두 사람의 인연을 짐작하겠다. 화자가 그린 그림은 어두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 몇 점이다. 굽은 나뭇가지며 거기서 뻗은 잔가지며 다 생략하고 그린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매화꽃 향기 묵향(墨香)인 듯 배어나는 어떤 사랑의 내력…. 시인의 은근하고 진중한 삶의 자태랄지 시론(詩論)이 엿보이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