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을 16년 만에 해약하러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우체국에 가면서 차제에 새 통장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창구 직원이 영 깐깐하다. 잠바를 걸친 내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통장을 만드는 이유가 뭐냐고 따진다. 헉, ‘노후에 대비해 이제부터라도 아내 몰래 용돈을 모아 보려는 것’이라고 털어놓아야 하나. 내 돈을 맡기겠다는데 감사 인사는 못할망정 개설 목적을 쓰라니…. 내가 황당해하자 직원이 선심 쓰듯 ‘통장 해지 및 신규 개설’이라고 쓰란다. “요즘 대포통장이 많아서 그렇다”고 양해를 구하며.
▷“너무 오래 거래를 하지 않아 10원은 국고에 귀속됐지만 원하면 환급해드리겠다”길래 기꺼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했다. 신분증 외에 사원증까지 요구해 복사하도록 내주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통장을 넘기지 않겠다’는 서류에도 서명해야 했다. 졸지에 범죄 용의자 취급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하다. 알아보니 우체국만 그런 게 아니다. 정부가 범죄 온상인 대포통장과의 전쟁에 나서면서 모든 금융기관에서 통장 만들기가 까다로워졌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