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 문화부장
지난해 칸 영화제에 맞춰 급히 출품한 칸 버전이 경쟁 부문 진출에 실패한 뒤 젊은 편집자가 맡아 대폭 수정한 게 ‘베니스 버전’이다. 120분이던 분량은 94분으로 압축했고, 누드신과 베드신 등 주요 장면의 배치 순서도 바꿨다.
살짝 궁금했다. 영화의 최종 편집권(Final Cut)은 감독에겐 예민한 사안이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영화 ‘설국열차’의 북미 개봉을 놓고 미국 배급사가 원작의 20분을 잘라내는 재편집을 요구해 몇 개월이나 줄다리기했다.
그런데 임 감독은 “젊은 감각으로 전폭적으로 해 보시오”라며 선뜻 의견을 받아들여 오히려 스태프를 놀라게 했다. 재편집 후에는 “정돈이 꽤 잘됐다”고 후배들을 칭찬해 ‘역시 거장’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렇게 가다듬어진 ‘베니스 버전’은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베니스 영화제에 이어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됐고,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하지만 이런 성과보다 더 빛나는 건 임 감독이 보여준 소통의 자세 같다. 자식뻘의 까마득한 후배 말에도 겸손하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임 감독이 거장의 자존심으로 기존 방식만 고집했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었을 거다.
‘큰 귀’는 가요계에도 있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조용필 씨는 요즘도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챙겨 듣는다고 한다. 수많은 불후의 명곡을 남긴 그는 입버릇처럼 ‘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발표한 ‘바운스’는 10대들까지 “빠운스∼ 빠운스∼” 따라 부를 만큼 신드롬을 일으켰다.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고집하는 대신 끊임없이 젊은 감성에 귀 기울이며 소통하고자 했기 때문일 거다.
문화계 두 거장의 모습은 사회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도 일맥상통한다. 리더십 멘토로 유명한 존 맥스웰은 저서 ‘어떻게 배울 것인가’(비즈니스북스)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고수들의 공통점으로 겸손과 배우는 자세를 꼽았다. 자존심이 ‘누가 옳은가’에 관한 문제라면, 겸손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라는 것이다. 그는 성공한 사람일수록 ‘듣는 게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휘자 얘기지만, 꼭 지휘자만의 얘기는 아니다.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