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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당한 상점 불탄채 그대로… 흑인들 분노 아직 ‘진행형’

입력 | 2015-04-08 03:00:00

[美 퍼거슨市 ‘흑백충돌’ 8개월]‘인종차별의 민낯’ 현지 르포




‘상처 치유’ 그날은 언제나… 지난해 11월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 때 시위대의 방화로 한쪽이 불에 타 주저앉은 네일아트 상점 건물이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채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위 사진). 전미흑인법조인협회(NBA)가 지난달 28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 르네상스호텔에서 개최한 ‘퍼거슨 사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미나 시작 전에 한 여성 흑인 운동가가 손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퍼거슨=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신석호 특파원

지난달 28일 오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카운티의 퍼거슨 시. 지난해 8월 9일 백인 경관에 의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 군(당시 18세) 총격 사망 사건 이후 7개월여 동안 폭동과 시위가 휩쓸고 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상점 밀집가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웨스트플로리선트 가에는 파괴된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고 거리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한인 교포가 운영하던 휴대전화 대리점 ‘JC와이어리스’ 매장은 아직도 시위대가 지른 불에 탄 뒤 무너진 모습 그대로였다. 그 건물 남쪽으로 삐죽이 솟은 대형 성조기와 맥도널드 햄버거 광고 아치만이 이곳이 이라크와 시리아의 전쟁터가 아니라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 아직도 남아 있는 핏자국

사건 이후 미국 CNN과 폭스뉴스 등 방송사 기자들이 생방송을 하는 장소로 유명한 주유소 건물도 파괴된 채 주유기 몇 대만이 서 있었다. 아랍인이 소유한 옆쪽 ‘네일아트’ 건물은 마치 공습이라도 받은 듯 건물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퍼거슨 경찰서 옆에서 흑인 미용 용품점을 운영하는 교민 이백우 씨는 “계속된 시위로 흑인 주민들조차 저녁에 거리에 잘 나오지 않아 도시의 활력이 떨어졌고 당연히 매출도 줄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브라운 군이 백인 경관 대런 윌슨(29)의 총에 맞고 쓰러진 주택가 도로에는 아직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흑인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놓고 가는 곰 인형과 꽃다발들이 찬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브라운 군 또래의 흑인 청년 두 명이 이곳을 지나다 주변을 촬영하는 기자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내 사진을 찍지 말라’고 경고하며 사라졌다. 언론과 외지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이 깊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날 안내는 사건 현장이 지역구인 샤론 페이스 미주리 주 하원의원이 자청하고 나섰다. 백인 여성이지만 흑인 지역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4선 의원인 그는 “지역구 흑인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백인 경찰관들이 밤중에 이곳을 지나며 추모 상징물들을 경찰차로 들이받거나 심지어 오줌을 누고 달아났다’ 등 불신과 증오를 전하는 증언들이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브라운 군이 사망한 지점에는 누가 세워 놓은 것인지 검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 위에는 하얀 페인트로 “그(백인)들은 우리(흑인)를 매장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씨앗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They tried to bury us, but they didn‘t know we were seeds)”는 비문(碑文)이 쓰여 있었다.

○ “다음은 엄마 차례야?”

기자가 퍼거슨을 방문한 지난달 28일 오전에는 전미흑인법조인협회(NBA) 주최로 ‘퍼거슨 사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대형 세미나가 한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만난 흑인 시위 지도자들은 자신이 왜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시위대를 이끌며 미국 언론을 통해 유명해진 데릭 로빈슨 목사(35)는 “처음 브라운 군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늘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곁에서 울고 있었는데도 시신이 몇 시간째 길 위에 방치되고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해 시위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곳 흑인들은 모두 브라운 군의 죽음을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칼로스 볼 씨(27)는 “2013년 내 친형이 백인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브라운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치 동생을 잃은 듯 가슴이 찢어졌다”고 했다. 아이아나 델라인 씨(26·여)는 “시위 현장에서 흐느끼는 나에게 네 살짜리 아들이 ‘다음은 엄마 차례야?’라고 묻는 것을 듣고 내 아들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많은 미국인은 이런 흑인들의 외침을 ‘못 배우고 가난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일부 흑인들의 불만’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난달 4일 미 법무부가 2013년부터 퍼거슨에서 일어난 흑인들에 대한 조직적 차별 실태를 고스란히 담은 보고서를 공개하자 미국 사회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백인 중심으로 이뤄진 경찰과 법원이 흑인들을 표적으로 단속하고 고액의 벌금을 물려 시 재정을 충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2만1000명의 퍼거슨 시에서 흑인은 76%였지만 경찰에 체포되거나 영장이 발부되는 비율은 90%를 웃돌았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흑인들을 길거리로 나오게 만든 분노의 근원을 찾아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변화를 위한 몸부림

퍼거슨에서는 미주리 주 의회 의원들이 중심이 돼 다양한 제도 개선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현지 세인트 마크 패밀리 교회에서 만난 페이스 하원의원과 흑인인 토미 피어슨 하원의원은 기자에게 최근 미주리 주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흑인 차별 방지 법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법안(HB38)에는 경찰관 교육에 ‘다양성과 민감성’ 과목을 넣었습니다. 한마디로 인종적 지역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소요나 평화적 시위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을 가르치자는 겁니다. 그래야 퍼거슨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습니다.”(페이스 의원)

피어슨 의원은 “윌슨처럼 크게 위태롭지 않은 상태에서 피의자에게 무력을 사용한 경찰관은 반드시 직무에서 제외돼 무급으로 조사를 받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며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경찰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적 쇄신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흑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토머스 잭슨 시 경찰서장이 지난달 19일 물러났다. 새로 부임한 앨런 아이코프 서장대행은 지난달 26일 “주민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며 “우선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면서 주민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흑인들은 더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요구했다. 조지프 모로 목사(48)는 “찔끔찔끔 바꿀 것이 아니라 경찰과 법원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바꿔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교사인 그의 아내 글로리아 모로 씨(49·여)도 “중환자에게 반창고를 붙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약을 써야 한다”며 “주민들의 요구를 외면하면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퍼거슨=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