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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듣는 순간 ‘삘’이 왔다, 뜻 몰라도 즐겁게 들려“…누구?

입력 | 2015-04-08 14:13:00

한국문학번역원의 최초이자 유일한 외국인 직원 아그넬 조.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개새끼’ 앞에서 막혔다. 박형서의 단편소설 ‘아르판’을 번역할 때다. “한국에 남겨두고 온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마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개새끼처럼 뛰어다니기도 했다”란 문장을 마주했다. ‘개새끼’를 영어로 옮기려면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 그냥 dog(개)로 하자니 심심하다. mutt(특히 잡종인 개)나 mongrel(잡종견), stray dog(야생 개) 등을 놓고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점잖지 못하게 마구 날뛰는 모양’을 잘 살리기 위해 mutt로 골랐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나.》

난 인도 뉴델리에서 온 서른한 살 아그넬 조셉이다. TV만 틀면 유창한 한국말에 잘 생긴 외국인들이 줄지어 나오는데, 여기서 인사하려니 무척 쑥스럽다. 그래도 내 명함을 건네면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란다.

‘한국문학번역원 영문화권/E-Book팀 아그넬 조셉.’

한국 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처음이자 유일한 외국인 직원이다. 지난해 8월 입사해 번역원에서 일하며 한국문학 번역도 하고 있다. 인도 학교에선 영어로 교육해서 영어는 영어권 국가 못지않게 잘한다. 올 2월엔 고국 인도에서 열린 뉴델리국제도서전에 소설가 신경숙, 시인 최승호 최정례 선생을 모시고 다녀오기도 했다. 그분들도 내가 인사하니까 깜짝 놀라시더라.

○건달과 간다르바

고교 시절 부모님 조언에 따라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어쩌면 돈 잘 버는 의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비위가 약해 쥐도 해부할 수 없어 곧 포기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동아시아 언어 중에 고민했다. 삼촌이 인도 네루대 일본어과 교수라 자연스럽게 한국, 중국, 일본에 대해 알게 됐다. 세 나라의 언어를 인터넷으로 찾아들었는데, 한국어를 듣는 순간 ‘삘’이 왔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없이 뜻을 몰라도 그저 즐겁게 들렸다.

한국말은 모국어인 말라얄람어와도 비슷하다. 지금도 멍하니 한국말을 듣고 있으면 말라얄람어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지 착각할 때도 있다. 부모님도 한국에 놀러 와선 똑같이 느꼈다고 했다. 실제 한국어 중엔 인도어에서 유래된 단어들이 있다. 조직폭력배나 깡패를 지칭하는 ‘건달’이란 말도 인도 산스크리트어 ‘간다르바’(Gandharva·음악을 다스리는 신)에서 유래했단다.

2001년 주저 없이 네루대 한국어과에 입학했다.

수업 첫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국인 선생님이 맨 앞자리에 앉은 날 보더니 창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땐 선생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바라만 봤다. 눈치 빠른 친구들이 창문을 열 때까지 멍했다. 한국말을 인터넷으로만 들었지 한국인 입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들은 한국말이 “창문을 열어 달라”니, 무척 의미심장하다. 내게 한국으로 창을 내준 것은 문학이었다. 한국어를 잘 하고 싶어 한국문학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읽은 작품이 박완서 선생의 ‘엄마의 말뚝’이다. 소설에선 남편을 잃고 서울로 올라와 터를 잡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우리 어머니도 인도 남부 시골마을에서 대도시 뉴델리로 올라오셨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어머니 고향 풍경과 정서가 고스란히 박 선생의 소설 속에 녹아 있었다. 그때 느낀 교감이 한국 문학을 계속 갈구하게 했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놀라웠다. 나도 살집이 있는 편이라 지하철에 앉아서 갈 때면 혹시나 옆 사람에게 살이 닿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소설에선 뚱뚱한 남자 주인공이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를 하는데, 나처럼 뚱뚱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날 이후 한국 문학에 완전히 ‘꽂혔다.’

○갑과 을에서 벗어나고파

2006년부터 2년간 한국에 머물며 경희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 체류가 끝나고 인도로 돌아가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계약서엔 한국 문학에서 만난 아름답고 맛깔 나는 문장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갑과 을밖에 없었다. 수입은 넉넉했지만 딱딱한 문장만 가득한 문서들을 번역하고 있자니 답답했다. 고민 끝에 2012년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5기 과정에 지원해 합격했다.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 싶은 원대한 포부가 생겼다, 이런 포부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그저 퍼즐 조각을 맞추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한국어를 영어로 옮길 때 느껴지는 이기적인 쾌락 때문에 번역을 시작했다. 인도는 다채로운 문화와 민족, 언어의 땅이라 언어 사이를 항해하게 하는 번역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기도 했다.

번역아카데미는 전쟁터였다.

한국인 4명과 영국인 2명, 미국인 1명 그리고 나까지 8명이 한 반이었다. 외국인 넷은 ‘가실게요’ 같은 문법에 어긋나는 한국어 사용에 한국 사람보다 더 분노할 준비가 돼 있었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도 치열하게 논쟁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엔 얼굴이 벌게지고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예능프로그램 유행어 ‘사람이 아니무니다’ 같은 대사도 번역해야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육두문자 섞인 욕도 맛깔나게 번역해야 했다. 한국어 문장 하나가 영어로 얼마나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살짝 김빠지는 일도 있었다. 처음 번역을 배울 때 ‘구름처럼 몰려들다’, ‘약속이나 한 듯’, ‘병풍을 두른 듯’ 같은 표현은 매력이 넘쳐흘렀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 번역해서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중에야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문구라는 걸 알았다. 가장 많이 만나는 서술어는 ‘떠오르다’. 그래서 매번 상황에 맞게 새롭게 번역하느라 고민이다.

2013년 번역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제12회 한국문학번역신인상에 응모했다. 원고 마감 직전까지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 하성란 소설 ‘오후, 가로지르다’를 번역했는데, 오후가 그냥 오후인지 어떤 하루의 오후인지 고민했다. 소설은 ‘수많은 큐비클들 사이를 길고 검은 그림자가 휙 가로지른다’라는 문장으로 끝났다. 오후(afternoon)와 가로지르다(across)를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Cutting Across the Afternoon of Life’로 정했다. 일생을 가리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카를 구스타프 융의 ‘인생의 오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단순히 ‘Afternoon, Cut Across’로 번역할 걸 그랬다. 번역에는 정답이 없고 그저 고민 또 고민뿐이다.

여기서 잠깐, 아그넬 조셉은 신인상 결과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번역원 동료 오은지 대리가 대신 귀띔했다.

조셉은 그해 영어 분야에서 미국 영국 같은 본토 영어권 응시자를 제치고 첫 단독 수상 영예를 안았다. 원래 영어 분야는 공동 수상자를 선정했는데 1등과 2등의 실력차가 크다는 이유로 1명만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문학작품처럼 읽히는 완성도 높은 번역”이라고 극찬했다.(조셉은 “상금은 한 명에게 몰아서 주지 않았다”며 조금 아쉬워했다.)

그해 번역원은 영어권 진출확대를 위해 ‘영어권/E-book팀’을 신설하고 한국어와 영어 실력이 능통하고 한국문학에 조예가 깊은 원어민을 찾고 있었다. 다른 영어권 국가 출신보다도 번역 실력이 뛰어난 조셉이 적격자로 인정받았다.

2014년 10월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었다. 매년 10월 마다 같은 분(고은 시인)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그 분 집 앞에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그분이 노벨문학상 발표일에 맞춰 한국을 비우는 모습이 생경했다. 나도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받길 고대하지만, 한국엔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아도 훌륭한 작가들이 충분히 많다. 한국 문학도 강하다!

TV에 나오는 외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우리나라는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한 나라의 문화나 국민의 생각을 저렇게 쉽게 규정해도 되나 싶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이 한국 문학을 좀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한국 문학은 주제도, 쓰는 방식도 다채롭다. 게다가 단편문학이 굉장히 발달돼 있다. 한국 문학과 정신은 연결돼 있고, 문학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똥피리는 어떻게

“박제가 되어버린 번역가를 아시오.”

이상의 ‘날개’ 도입부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를 비틀어 써봤다. 번역아카데미 동기는 이상을 좋아하는 나를 “어이, 박제 양반”이라 부른다. 이상은 순전히 자기를 위해 쓰는 작가라 매력 있다. 성공 명예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원하는 대로 써나가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나. 텍스트를 제일 깊게 읽는 번역가로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이상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요즘 작가 중엔 박민규의 문장이 늘 새롭다. 이렇게 한국문학과의 사랑은 계속된다. 아직 결혼 안 한 노총각이지만 당분간은 한국문학과 진하게 연애하고 싶다.

다시 씨름하고 있는 번역 문제로 돌아가야겠다. 박민규 작가의 ‘낮잠’ 중에 이런 묘사가 나온다. “노성진의 왼편, 두 자리 건너에 앉은 놈이 정동필이다. 키가 큰 윤동필이란 친구가 있어 작은 동필이라 불리던 녀석이다. 백육십이 될까 싶은…정말이지 작은 키다. 참견하길 좋아하고 촐싹대는 면이 있어 ‘똥피리’ 란 별명을 따로 갖고 있었다.”

아, 똥피리는 또 어떻게 옮겨야 하나.

조셉 씨와 인터뷰를 그의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그의 한국어는 완벽해서 통역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이름 아그넬(agnel)은 인도에서도 흔한 이름이 아니라 인도 공무원은 실수로 angel(천사)로 그의 여권을 발권했다. 한국 문학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될지 기대해본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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