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밀려 오랫동안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빌라의 몸값이 올해 들어 가파른 상승세다. 높은 아파트 전세금에 치인 신혼부부 등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를 사들이기 시작해서다. 초저금리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투자자들도 전·월세 임대 목적으로 빌라를 눈여겨보고 있다. 아파트 일변도였던 한국의 주택시장에서 ‘마이너리티의 반란’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로13길(상도동) 주택가 일대를 찾았다.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에서 내려 3분가량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자 길 양쪽에 500m 길이의 빌라촌이 이어졌다. 15년 전만 해도 단독주택이 많았지만 이젠 4, 5층짜리 빌라가 대신 들어차 있었다.
▼ 찬밥 시절은 잊어라… 빌라 거래량 7년만에 최대 ▼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로13길(상도동)의 한 골목에 신축 빌라들이 쭉 늘어서 있다. 전세난으로 빌라가 아파트의 대체재로 떠오르면서 최근 빌라 거래와 분양, 신축이 활발해지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지금이야 한국인 주거의 59%를 아파트가 차지하며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았다. 단독주택의 단칸방에 올망졸망한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화장실, 수돗물을 쓸 때마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던 세입자들은 서글픈 ‘셋방살이’의 탈출구로 연립·다세대주택을 택했다. 연립인들 형편이 무에 그리 나으랴.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 이웃과 부대끼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없이 사는 설움에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10일 찾은 상도동 빌라촌은 소설 속 ‘무궁화연립’처럼 허름한 빌라가 줄줄이 이어진 낙후된 곳이 아니었다. 최근 빌라 수요가 늘면서 계속 신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전봇대마다 빌라 분양을 알리는 광고물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주차장 100%, 최신형 엘리베이터, 가구별 대형 창고’ 등 기존 빌라의 단점을 보완했다는 내용을 앞세웠다.
이 지역에서 26년째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는 현금복 공인중개사는 “빌라가 한동안 ‘똥값’이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을 받고 있다”며 “최근 아파트 전세 재계약과 빌라 매입을 놓고 저울질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빌라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경매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아졌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1일 서울 남부지법 경매에 나온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다세대주택 전용면적 63.14m²(3층)는 첫 번째 경매에 60명의 응찰자가 몰려 감정가(1억 원)보다 61% 높은 1억6100만 원에 낙찰됐다.
아파트에 소외됐던 빌라
좁은 골목길에 빌라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면서 주거환경은 열악해졌다. 1990년대 이후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빌라는 재개발예정구역 내 아파트 분양권을 받기 위한 투기 수요를 제외하고는 실수요자의 관심 밖으로 차츰 사라져갔다.
전세난·초저금리 바람 타고 귀환
빌라의 반전은 지난해 시작돼 올해 들어 본격화됐다.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전세난이다. 소형 아파트 전세금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전세 물량도 자취를 감추며 빌라가 부각된 것이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지역 빌라의 m²당 평균 매매가격은 356만2000원으로 서울 아파트 전세(m²당 402만7000원)보다 11.5% 싸다. 전용면적 60m² 아파트 전세로 2억4162만 원에 살고 있는 세입자가 같은 크기의 빌라를 2억1372만 원에 구입하고도 3000만 원 가까이 남는다. 대출을 보태면 현재 아파트보다 큰 면적의 빌라를 사서 옮길 수 있다. 관리비도 아파트에 비해 저렴하다. 전용 59m² 신축 아파트의 경우 10만∼15만 원(난방비 제외) 선이지만 비슷한 넓이의 빌라는 3만∼4만 원에 불과하다.
동작구 상도동의 장병섭 공인중개사는 “예전에는 고객들에게 좋은 물건이라고 거듭 추천을 해도 빌라라고 하면 거들떠도 안 봤는데 요즘은 인식이 달라진 것 같다”며 “아파트 전세를 찾기 힘들다 보니 세입자들이 빌라를 사러 나서면서 올해 초 급매물이 모두 소진됐다”고 전했다.
수요가 늘다 보니 빌라 신축도 활발해졌다. 10일 찾은 서울 은평구 갈현동 일대에는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을 중심으로 반경 1km 안에 20여 곳의 신축 빌라가 분양되고 있었다. 새 아파트를 짓는 뉴타운·재개발계획이 취소된 지역에서 건축 규제가 풀리면서 신축 빌라 공급이 늘고 있다. 빌라 분양·매매 전문기업인 가담주택의 박태영 실장은 “올해 들어 빌라 관련 문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가량 늘었다”며 “아이가 태어나고 이사를 그만 다니고 싶은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부부들이 역세권 신축 빌라를 중심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상 초유의 1%대 금리 시대가 열리면서 임대수익을 목적으로 빌라를 찾는 투자자들도 늘고 있다. 초기 투자비용이 적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룸·오피스텔보다 월세는 싸지만 방 2, 3개짜리 빌라는 공실이 거의 없어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기존의 단독주택을 다세대주택으로 재건축해 수익률을 높이는 토지주들도 늘고 있다. 수목건축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토지를 갖고 있는 50대 김모 씨는 노후대책으로 땅을 팔아 상가나 아파트를 살 계획이었지만 고민 끝에 다세대주택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해 토지를 담보로 7억5000만 원을 대출받아 다세대주택을 지은 뒤 10채를 전·월세로 임대했다. 보증금으로 대출을 절반 상환했고, 현재 한 달에 1000만 원의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다. 땅을 그대로 보유한 상황에서 투자 대비 수익률은 연 35%에 이른다.
주택에 대한 인식변화도 한몫
“비싸도 아파트를 사야지. 빌라를 왜 사냐. 집값 떨어지고, 되팔기도 힘든데….” 빌라 분양관계자들에 따르면 50대 이상에게는 여전히 빌라는 인기가 없다고 한다. 주택을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보는 인식이 강하고 아파트 불패신화를 겪어봤기 때문에 아파트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처럼 주택 가격이 급등하기 힘들다는 시각이 확산되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빌라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난해 신축 빌라로 이사한 김모 씨(36)는 “비싼 아파트를 사서 대출이자와 비싼 관리비에 허덕이며 허리띠를 졸라매기보다는 그 돈으로 여행을 다니는 등 여유롭게 살고 싶다”며 “처음엔 빌라로 옮기면서 걱정도 했는데 지금은 비교적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요즘 빌라를 지을 땐 1층을 필로티로 만들어 가구당 1대의 주차공간을 확보하도록 만든 점도 젊은층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집은 없어도 차는 폼 나게 굴려야 하는’ 젊은층에게 주차장은 필수다.
‘집장사들이 마구 찍어낸 하자 많은 집’이라는 인식도 점차 바뀌고 있다. 최근 지어진 빌라들은 주거의 질에서 아파트와 큰 차이가 없다. 건물 출입문에 번호키를 설치하고 폐쇄회로(CC)TV를 장착하는 등 보안도 강화됐고 계단만 있던 옛 빌라들과 달리 엘리베이터도 대부분 설치돼 있다.
최근 신도시나 택지지구 등에는 테라스를 갖춘 ‘테라스하우스’라는 연립주택이 늘어나고 있다. 테라스가 마당 역할을 해 단독주택의 쾌적성과 아파트의 편리성을 갖춘 틈새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GS건설이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분양한 ‘청라파크자이 더 테라스’는 580채 모집에 6126명이 신청해 평균 10.56 대 1의 경쟁률로 순위 내 마감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분양에 실패했던 수도권 신도시 연립주택용지들이 지난해부터 속속 주인을 찾으면서 앞으로 저층 테라스하우스 분양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대세 현상이 뒤집히지는 않겠지만 빌라를 포함한 다양한 주택에 대한 수요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을 자산 증식 수단으로 보면서 지금까지 실제 여력보다 과하게 주택을 소비한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 능력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다양한 주택 유형을 소비하는 패턴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redfoot@donga.com·홍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