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쓴 편지]엄마 아빠 형, 나 요셉이 없어서 많이 힘들지
《 세월호 유가족은 물론이고 생존자, 자원봉사자, 민간잠수사, 진도 어민 등은 세월호 1주년을 맞아 편지를 썼다. 누군가는 밤새 고민해 간신히 썼다며 쑥스러워했다. 글쓰기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기에 내용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향한 그리움, 살아남은 생존자와 유가족을 향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감사함. 그들의 진심을 기사로 조심스레 옮긴다. 편지 전문은 동아닷컴(www.donga.com)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기도해줄게… 걱정하지마 사랑해♥”
“엄마 아빠 형… 나 요셉이 없어서 많이 힘들지. 조금만 기달려 내가 오래오래 살아 가서 천국 빨리 갈게.”(오래 살아 천국 가겠다는 의미)
“내가 기도도 많이 해 줄게. 그러니까 걱정 하지마♡ 사랑해♥”
“나도 안산에서 태어나서 중3 때까지는 안산에서 살다가 고1 때 진도로 이사 와서 너희 학교(단원고)에 아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어.”
세월호 참사 직후 실종자 가족들이 머무르던 진도실내체육관을 바라보고, 하루에도 수십 번 구급차와 헬기 소리를 들었던 진도고 학생들도 우울 반응을 보였다. 조 군은 특히 힘들어했다. “내가 아는 친구는 구조됐을까?”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기 두려웠다고 적었다. 조 군은 참사 1년이 다 되도록 살아남은 친구에게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다며 “친구가 이 편지를 꼭 읽어주고, 위로를 건네고 싶은 저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안산시를 방문한 조도면 주민들은 생존 학생들이 쓴 감사 편지를 전달받았다. 비록 일 때문에 단원고에 가지 못했지만, 박 씨는 답장을 하고 싶다며 “아저씨가 많이 오래오래 사랑할게, 섬마을 절대 잊지 마라”고 응원의 편지를 썼다.
또 다른 서거차도 주민 정해석 씨(48)도 함께 편지를 썼다.
“더 잘해서 보내지 못한 우리가 더 미안할 따름이지… 훗날 훌륭한 ○○, ○○이가 되어서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김 씨는 트라우마 때문에 의도치 않은 언행이 불쑥 튀어나오는 등 일상생활이 버거운 상태다.
단원고 생존 학생들은 김 씨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김 씨는 “그 친구들도 힘들 텐데 나까지 챙겨줬다”며 미안해했다. 김 씨는 학생들에게 감사와 함께 이겨내자는 응원을 전하겠다며 편지를 썼다. 심리치료 등으로 힘겨운 김 씨 대신 부인 김형숙 씨가 편지를 작성했다.
허 씨는 “그냥 말로 하는 게 편한데…”라며 멋쩍어했다. 서울 광화문광장도 찾고, 국회와 청와대 인근 분수광장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는 1년간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힘든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다. 딸을 찾으면 고맙다고 한 명, 한 명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지만, 아직 딸 다윤이는 바닷속에 있다. “그분들께는 너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보고 있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져 눈을 못 맞춘다.”
그는 실종자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는 절규를 편지에 담았다. ‘유가족’이 되면 도움을 준 자원봉사자와 국민들에게 다시 감사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묵묵히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이달 7일은 경원이의 생일이었다. “미안하구나. 누나 없이 맞이하는 생일. 케이크는 샀지만 차마 노래가 나오질 않아 눈물만 뚝뚝 흘렸지. 행복하고 즐거워야 할 생일을 눈물로 보내는구나.”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을 마음껏 축하해줄 수 없었던 게 내내 걸렸다. “미역국도 먹기 싫다는 아들, 축복받아야 할 생일을 그냥그냥 평범한 날로 보내게 해서 가슴이 저려온다.” 가족들 마음 아플까봐 누나를 화장할 때 외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들이 더 가슴 아프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파이팅 하면서 살자. 흐드러지게 피어 화사한 벚꽃처럼 오늘 하루도 한번 웃어 보면서 하루를 살아 보자. 그래야 누나가 좋아할 거야. 따라쟁이 동생이 오늘은 웃는다고 누나도 따라 웃을 거야.”
“며칠 전에는 길을 가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눈물이 쏟아지더구나. 왜일까 생각하니 너와 함께했던 마지막 봄을 내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여기 남아 있는 학부모들도 선생님인 너와 함께 있어 많은 위로가 되실 거야. 제자들 잘 보살펴 주거라. 이제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 또 편지할게.”
이 군의 부친 이기홍 씨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고 했다. 이 씨는 지난 1년간 몸무게가 15kg 이상 줄어들고 시력도 급격하게
나빠져 일을 그만뒀다.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으나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고, 돋보기 안경을 써야할 만큼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이
군의 동생 다슬 양(16)이 아버지 대신 펜을 들었다.
“오빠가 노래 작사 작곡할 때 가사나 멜로디 수정할 부분 있으면 같이 하고 둘이서 비밀 얘기도 많이 했었는데….”
다운 군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를 때 함께 듣곤 했던 동생과 아버지는 다운 군 방에 놓인 기타를 보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동생은 다운 군이 돌아와 기타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 씨는 세월호 1주년을 얼마 앞두고 단원고 고 김수빈 군의 이모부 박용우 씨의 전화를 받았다. 바지선에서는 자주 봤지만, 경기 안산시로 올라간 뒤 처음 온 연락이었다. 전 씨는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했단 마음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고마운 마음과 응원을 꼭 전하고 싶다”며 편지를 작성했다. 전 씨는 일부러 노란 편지지를 고르고, 편지 위쪽에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붙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단 말 전합니다. 저희에게 고맙다고 부탁한다고 하셨던 것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있나 싶네요. 이제 저희가 응원해 드립니다. 잘 이겨내시고 힘내시고요. 항상 건강부터 챙기시고요.”
“그 당시 나 자신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직접 건질 수 없었기에 절실히 (도움이) 필요했고, 또 의지했고 믿었던 잠수사님들이었기에 우리 가족에겐 너무도 중요했습니다.”
경기 부천시에서 만난 안 씨의 모친 황정애 씨(56)는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잠수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황 씨는 “이들의 살신성인이 없었다면 저는 평생 한을 안고 살아갔겠죠”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일등봉사대라는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는 김수옥 씨(56·여)는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전남 진도군으로 향했다. 김 씨는 “8년 전 교통사고로 17세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의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약 다섯 달 동안 팽목항에서 바라본 유가족들의 모습을 노란 편지지에 담았다. “쓰러져 주사 맞고 다시 울던 엄마, 아이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기도하는 아빠,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던 가족들….” 김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편지로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당부를 전했다. 지금은 힘들어도 받아들이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은 현실대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이 하늘나라에서 부모님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이건혁 gun@donga.com·최혜령·김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