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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은 오래전에 끝났다”… “오바마는 쿠바에 빚진 것 없어”

입력 | 2015-04-13 03:00:00

[美-쿠바 59년만에 정상회담]
양국 정상 “갈등 끝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한목소리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앞에서 내가 너무 감정적인 표현을 한 것을 사과한다. 오바마 대통령 이전 10명의 미국 대통령은 우리(쿠바)에게 진 빚이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아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84)은 11일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정상회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설 초반에 탁자를 탕탕 치며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대(對)쿠바 적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던 그는 자신보다 30세 적은 젊은 지도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칭찬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카스트로 의장은 1시간에 걸친 긴 연설의 상당 부분을 오바마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는 데 할애했다.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나는 그의 책을 읽었고 그의 인생을 존경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수수한(humble) 배경을 가졌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형인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역대 10여 명의 미국 대통령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냈던 것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카스트로 의장의 연설은 쿠바 국영방송사가 중계했고,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는 연설 전문을 실었다. 이날 35개국 정상의 연설 시간으로 각 8분이 할애됐으나 카스트로 의장은 앞서 6차례 OAS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를 들어 “나에게는 48분을 더 줘야 한다”고 농담조로 말해 좌중의 폭소가 터졌다. 쿠바는 1948년 결성된 OAS의 창립 회원국이었다가 미국이 금수조치를 한 1962년부터 회원국에서 제외된 뒤 2009년 자격을 회복했으나 그동안 미국의 반대로 정상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연설에서 “우리는 더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뒤 “냉전은 오래전에 끝났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시작된 문제와 싸움하는 것에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은 여러분과 함께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말했다.

1961년 국교 단절 이후 54년 동안 갈등을 빚어온 두 나라의 정상이 한목소리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화합의 목소리를 내자 회의장은 화합의 분위기로 넘쳤다.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파나마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내 히스패닉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업적을 남길 것”이라며 “쿠바를 향해 그가 내놓은 새로운 정책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전날 환영 만찬장에서도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며 악수했던 두 사람은 이번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8일 한 차례 통화를 하기도 했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두 정상은 OAS에 참석한 39개국 정상들의 연설이 모두 끝나자 옆방인 소회의실로 옮겨 두 사람만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시작했다. 미-쿠바 간 정상회담이 열렸던 1956년 이후 59년 만이며 양국이 국교를 단절한 1961년 이후 54년 만이었다. 회담 분위기는 50년 넘게 앙숙이었던 나라들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하고 격의 없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50대 미국 지도자와 80대 쿠바 지도자는 두 나라의 국기(國旗)조차 없는 작은 방에서 손을 맞잡은 뒤 작은 원형 탁자 한 개만 사이에 놓고 나무 의자에 마주 앉아 덕담을 주고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카스트로 의장에게 “새로운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며 “쿠바 정부와 쿠바 국민과 함께하겠다”고 하자, 카스트로 의장도 “우리는 미국과 무엇이든 논의할 것”이라며 “기꺼이 오바마 대통령이 표현한 대로 진전을 이뤄낼 것”이라고 화답했다.

때때로 서로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연출했다. 카스트로 의장이 “미국과 쿠바의 (협상) 대표단이 각자의 대통령 지시를 더 잘 들었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하자 오바마 대통령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어 한 시간 동안 진행된 비공개 회담에서는 미국과 쿠바의 외교관계 정상화, 대사관 재개설, 미국의 대쿠바 금수조치 해제와 경제관계 강화, 쿠바의 민주화와 인권 개선 노력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관계자는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교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주요 쟁점들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아직 두 정상이 모든 것에 합의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인권, 언론 자유 신장 문제를 거론했으며 미국이 아바나에 대사관을 열게 되면 외교관들이 쿠바 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카스트로 의장은 “두 나라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선을 긋고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에 요청한 대쿠바 금수조치 해제가 하루빨리 성사되는 것을 보길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정상은 비공개 부분을 포함해 한 시간 넘게 당면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이번에 정상들이 처음으로 만나 중요 내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워싱턴과 아바나에 양국 대사관을 재개설하는 문제 등 국교 정상화를 위한 양국 간 고위급 회담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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