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자원-비자금 수사는 매년 볼 수 있는 벚꽃이고 메가톤급 ‘성완종 리스트’는 언제 볼지 모를 불꽃놀이 리스트에 쏠리는 관심은 당연…무엇부터 규명할지도 자명 리스트 수사에 명운 걸 곳은 검찰이 아니라 정권이다
심규선 대기자
이완구 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패척결을 선언한 직후 ‘부패척결 선언, 찬밥 데워 먹는 느낌’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부패척결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고 수사 시기와 대상, 방법을 우려했다. 그러나 일각에서 부패척결에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수사에 딴지를 걸지 말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면서 이 총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성완종 회장의 자살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찬밥 데워 허겁지겁 먹다 급체에 걸린 모양새다.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의외로 빠른 결정이다. 그 배경에는 파장이 너무 크고 오래갈 것 같다는 판단,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 검찰의 위신 회복 의지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검찰은 수사 결정을 혼자서 한 것인가. 부패척결 수사는 정권의 기획수사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리스트 수사까지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하긴 어렵다.
이 총리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검찰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분명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관용 원칙에 입각해” 고질적 적폐를 척결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이번 일이 꼭 그런 사안이다.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이 총리가 총리 자리를 앞세워 그 역할을 고집한다면 엄청난 파란이 일 것이다.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이병기 비서실장의 해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실장은 억울하다는 성 회장에게 “잘못한 게 없으면 당당하게 조사를 받아라”라고 충고했다. 옳다. 실세들이라고 해서 다른 해법이 있을 수 없다.
리스트에 언급된 당사자들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게 마땅하다. 앞으로는 판에 박은 듯한 해명도 안 하는 게 좋겠다. 수사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성 회장은 정권 실세에 기대를 걸었지만, 정권 실세인 그들이 기댈 곳은 국민뿐이고 국민은 사실 규명을 원하고 있다.
여당도 잊어야 한다.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이나 행정부가 이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잔불이 오래간다면 곧바로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각자도생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검찰에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고 외압이 있다면 앞장서 막겠다고 한 것은 그 전조다.
검찰이 어떤 결과를 내놓든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규명하지 못하는 쟁점도 꽤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완종 리스트를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니 그런 인상만이라도 드러낸다면 이 정권은 더 큰 불행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급체는 어떤 수를 쓰든 일단 뚫어야만 다시 밥을 먹을 수 있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