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세월호 1주년/그때 그사람들] “살려달라는 절규 잊을 수 없어… 실종자 수색 끝낼 수가 없네요” ‘어선 몰고 구조’ 진도 대마도 주민 김대열씨
지난해 11월 11일 정부는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전남 진도군 대마도 주민 김대열 씨(46·사진)는 수색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수 없었다. 미안함 때문이다. 김 씨는 사고 당일 대마도 주민과 함께 1t 어선을 몰고 바다로 나가 학생 20여 명을 구했다. 처절했던 구조 활동이 끝나고 남은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여학생 하나가 엉엉 울면서 ‘삼촌. 친구들이 객실 안에 있어요. 저 유리창 좀 깨 주세요’라고 하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배에 두꺼운 유리를 깰 만한 도구가 없었거든…”
유리창 너머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학생들을 꺼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속 짐이 됐다. 사고 발생 보름쯤 지나 해경이 사고 해역에서 흘려보낸 부표가 대마도 해변으로 들어왔다. 파도에 실종자가 밀려온다면 대마도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씨는 부표를 발견한 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섬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구조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건네는 간절한 사죄였다.
이웃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마을 청년회장 김문욱 씨(49)는 “아직도 배 안에 갇혀 있던 얼굴이 선명한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라고 말했다. 정면용 씨(49·여)도 “4월 16일이라는 날짜와 그날 아침 미역을 말리던 평상만 보면 불쌍한 학생들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사고해역에서 돌아온 구조선… 세번째 배가 마지막일 줄이야” ▼
‘응급진료 파견’ 김재혁 목포한국병원 과장
김재혁 목포한국병원 응급의학과 과장(40·사진)은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9시경 응급실 당직을 서고 퇴근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동료 의사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TV를 켰다. 커다란 배 한 척이 기울어진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재난에 대비하라는 보건복지부의 전화도 왔다.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그는 동료 의사 4명, 간호사 4명과 함께 팽목항으로 떠났다.
“세월호는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에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죠. 다만 이 악몽이 우리 사회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큰 교훈이 됐으면 해요.”
▼ “분노 털고 끌어안아준 그분들… 마음은 지금도 팽목항 그곳에” ▼
‘217일간 가족지원 활동’ 주영로 경위
※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 경위는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팽목항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뚫고 조명탄은 쉴 새 없이 터졌다. 조명탄이 밝힌 어둠의 민낯은 공포 그 자체였다. 울부짖는 가족들의 얼굴이 사진처럼 뇌리에 박혔다. 처음으로 사람이 두려웠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단원고 학생들 또래의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였지만 가족들의 분노와 아픔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두려웠지만 먼저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넋두리를 들어 주고 사고 해역을 향해 108배 하는 가족들 옆에서 조용히 절했다.
사고 발생 100일이 지날 무렵 가족들은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지친 가족들은 그를 “형님” 또는 “동생”이라고 불렀다. 까맣게 타 쩍쩍 갈라진 얼굴로 세월호 수습을 담당해왔던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해체한 지난해 11월 18일까지 217일 동안 가족들의 곁을 지켰다. 그가 떠나던 날 가족들은 “그동안 너무 고생했고 감사하다”며 그를 꼭 끌어안아 줬다.
일상으로 돌아왔다지만 마음속 그의 시계는 여전히 1년 전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이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해요. 몸은 이곳 격포 바다 앞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팽목항에 있습니다.”
▼ “숨어 울던 아버지-빈소의 교복… 너무나 생생해 가슴 아려와” ▼
‘50명 장례’ 안산제일장례식장 박일도 대표
박 대표는 가족을 달래느라 빈소에서는 울지 못하고 건물 밖 어두운 곳에 숨어 몰래 흐느끼던 여러 아버지의 뒷모습이나 형제자매를 찾던 어린아이를 봤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는 “영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루 종일 오빠를 부르며 울던 초등학생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참사 후 1년이 지났지만 안전 의식이 아직도 제자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변한 것은 거리를 가득 메웠던 노란 현수막이 줄어들었다는 점뿐이다”라며 “사고 직후에는 어른들이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지난해 5월에는 학생들의 장례 수익금 중 5000만 원을 단원고에 기부했다. 빈소에 놓였던 단원고 교복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지난해 12월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초등학생 50명을 위해 교복 값으로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올해는 수혜자를 늘려 100명에게 기부할 예정이다. 장례 절차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 대표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얼마 전부터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가족들 얼굴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는 박 대표는 “참사로 떠난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다 아예 일을 그만 둔 직원도 많다”고 전했다. 그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우리도 힘들 정도인데,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추모 가사를 썼다. ‘오! 필승 코리아’, ‘서시’, ‘말리꽃’ 등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 이근상 씨가 곡을 붙인 이 추모곡은 음원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천호성 thousand@donga.com·박성진·최혜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