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4〉조순 서울시장
1995년 6월 29일 열린 조순 서울시장 당선 축하연. DJ는 “내가 조순 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그는 ‘김대중 씨가 내 도움을 받았지, 내가 김대중 씨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며 서운해했다. 앞줄 왼쪽부터 한광옥 정대철 조순 이종찬 이철. 공교롭게도 한광옥 의원을 제외한 네 사람 모두 경기고 출신이다. 동아일보DB
조순 서울시장 출마를 막후에서 DJ(김대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나였고,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있기 1년 전인 94년 11월 그를 만나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확인한 뒤 당시 권노갑 최고위원을 설득하여 민주당 공천을 받도록 한 사람도 나였다. 그 후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대승을 거두도록 배후에서 노력한 사람도 바로 나인데, 사전에 한마디 귀띔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조순 시장은 처음부터 DJ에 대하여 상당한 불신이 있었던 것 같다. 국민회의 창당 당시 그를 만나 신당 참여를 권고했지만 그는 냉정하게 “나는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됐습니다”라며 거부했다.
97년 7월 27일 사전 약속을 하고 조순 시장의 관저를 찾았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찾아왔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내일신문의 장명국 사장과 함께 갔다. 장 사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조순 시장의 제자이기도 했다.
조순 시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진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찾아뵈었습니다.” 인사를 한 다음 가지고 간 양주병을 내놨다. 곧 술상이 차려졌다.
“요사이 시장께서 시정(市政)을 떠나 정계에 나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찾아온 줄 알고 있습니다.” 조순 시장은 피하지 않았다.
“나도 그동안 생각할 만큼 생각했어요. 정치가 너무 혼탁합니다. 또 시정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혼탁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왕 당에 몸을 담으셨으니, 이제 정당을 통하여 하나하나 개선하고 초석을 쌓아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이 아니라 당내 기반을 쌓은 뒤, 다음번 기회를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암시였다.
그는 금방 말뜻을 알아차렸다. “나도 나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여야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정노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술 한 병을 다 비우기까지 계속 밀고 당기는 말만 계속했다. 약간 취기가 돌았다. 장명국 사장이 나섰다.
정곡을 찌르는 중요한 충고였는데 조순 시장은 대단히 불쾌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이야기합시다. 나도 많이 생각했고, 앞으로 더 생각하지요.”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9월 12일 조순 시장은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대선출마 선언을 했다. 출마선언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지만 조순 시장은 오판한 것이 분명했다. 여론은 조순 시장에게 불리했다. 그의 지지도는 이인제 경기지사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조순 시장은 여론조사가 나올 때마다 한 자릿수에 맴돌았다. 그에 관한 언론 보도 역시 점점 지면에서 사라져갔다.
11월 초 김영삼(YS)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신한국당의 이회창 총재와 ‘꼬마 민주당’의 조순 총재는 합당을 결행했다. 대권후보는 이회창, 총재는 조순. 이기택, 김윤환, 박찬종, 김덕룡은 공동선대위원장이라는 구도로 당이 정비되었다.
나는 이런 구도를 보고 또 한번 정치무상을 느꼈다. DJ가 조순을 서울시장 후보로 밀었을 때 민주당의 이기택 대표는 훼방을 놓았다. 그런데 이제 반DJ 진영에서 이기택은 조순을 총재로 모시게 되었다. 또 한편 YS가 이인제의 국민신당을 배후에서 도운다는 풍설이 나돌자 이회창은 YS와 완전히 절연한다는 의미에서 당명까지도 조순의 제의를 받아들여 ‘한나라당’으로 개명했다. 이것이 조순이 우리 정치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었다. 그 한나라당은 다시 새누리당으로 바뀌었지만….
▼ DJ계가 12억 빚내서 마련한 첫 ‘내 집’… 조순-이회창 합당 뒤 한나라당 소유로 ▼
마포 민주당사 ‘기구한 운명’
“마포에 있는 민주당사는 우리 민주 진영의 모든 것이 스며 있었다. 애환이 켜켜이 서린 곳이었다. 그러나 이기택 대표를 비롯하여 지도부가 버티고 있었다. 나는 5층짜리 마포 당사를 포기했다. 정말이지 피눈물을 흘려 마련한 당사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들어가 대표 경선을 해서 당사를 되찾자고 했다. 물론 너무 아깝고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국민 앞에 추태를 보이기 싫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자서전(2010년)에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과정을 설명하며 이런 소회를 남겼다.
서울 마포구 용강동의 마포주차장과 유명한 양고기집 ‘마포나루터’ 사이에 있던 민주당사는 DJ의 소회 그대로, 애환이 켜켜이 서린 민주진영의 집이었다.
대지 780m²(236평), 연건평 2284m²(691평)에 지상 5층, 지하 1층으로 1988년에 매입한 그 건물은, 무엇보다 DJ와 민주당 사람들이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었다.
그 이전엔 당사를 구하려면 ‘007 작전’을 펼쳐야 했다. 야당, 특히 김대중 야당에 건물을 빌려주려는 곳은 없었다. 무역회사를 가장해 임대계약을 하고, 야밤에 사무실 집기부터 들여놓은 다음 ‘버티기’를 해야 하는 비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사 자리로는 여의도가 제일 좋았다. 하지만 너무 비쌌다. 그래서 찾아낸 게 당시 15억9000만 원에 매물로 나온 그 건물이었다. 12억 원은 은행대출을 받고, 나머지 액수는 전국구 의원들에게 5000만 원, 3000만 원씩 할당했다.
하지만 정당의 이름으로는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업가였던 이재근 사무총장 개인이 대출받은 형식을 취했다.
DJ의 평민당은 1991년 광역의회 선거를 앞두고 재야인사들과 구(舊) 야권인사들을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재출범한다. 그리고 몇 달 뒤 YS(김영삼)의 3당 합당에 따라나서지 않고 독자 야당을 꾸려가고 있던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의 ‘꼬마 민주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용강동의 그 건물을 오늘날까지도 ‘마포 민주당사’로 기억하게 된 배경이다.
김대중 총재의 장조카이자 평민당 경리국장으로 당시 마포 민주당사 매입의 실무를 맡았던 김관선 전 광주시의회 부의장의 기억. “3개월에 한 번씩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갔는데 1992년 대선 패배와 함께 김대중 총재가 정계를 은퇴하고 이기택 대표가 당을 맡았을 즈음엔 대출금의 80% 이상을 갚은 상황이었다.”
이기택 대표나, 나중에 신한국당과 합당을 주도한 조순 총재의 땀 한 방울 배어있지 않은, 말 그대로 DJ와 DJ사람들의 피눈물로 마련한 당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포 민주당사는 이회창과 조순의 합당에 따라 법적으로 한나라당의 소유가 되고 만다. 한나라당은 1999년 3월 ‘마포 민주당사’를 22억 원에 매각해 이회창 후보의 ‘대선 빚잔치’에 충당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