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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토종 흑돼지 2000년 혈통 지켜달라고 꿀꿀꿀

입력 | 2015-04-18 03:00:00

진짜 재래돼지를 찾아라!




“제가 진짜 토종 꿀꿀이예요!” 8일 오후 강원 홍천군의 ‘산우리 재래돼지 농장’에서 주인 윤영배 씨가 축사에 있는 토종돼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홍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진짜 재래돼지를 찾아서

8일 오후 1시 강원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 진짜 재래(토종)돼지가 있다는 ‘산우리 재래돼지 농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구불구불한 자갈길을 차로 한참 달렸더니 길 끝 산자락에 있는 축사와 집이 보였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인적 드문 곳. 멀리서 얼룩덜룩한 개만 열심히 짖었다. 꼬리를 치는 것을 보니 반기는 것 같기도 했다.

“멀리 오셨는데 어떡해요. 재래돼지 몇 마리 안 남았는데….”

농장 주인 윤영배 씨(49)는 기자를 보자 마냥 안쓰러워했다. 그는 2000년대 초 12마리로 재래돼지 사육을 시작해 한창때는 3000마리까지 불렸던 사람이다. 씨돼지 12마리는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이 재래돼지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전국을 돌며 찾아낸 개체들이었다.

“2000년대 초 고성, 영월, 화천, 홍천 4곳에서 35개 농가가 재래돼지를 받아 키웠어요. 그때는 흑돼지로 유명한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처럼 강원도에서도 재래돼지 사육업을 크게 키우려 했습니다.”

그는 2008년 6월 ‘재래돼지’ 혈통 등록을 했다. 버크셔나 두록 같은 외래 돼지 품종과 자신이 키우는 돼지의 DNA가 다르다는 것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품종의 특징이 문헌에 나오는 고유의 우리 돼지와 같다는 점도 증명됐다. 2009년 8월에는 축산과학원과 공동연구 및 기술지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재래돼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한국인과 닮은 돼지

재래돼지의 생김새 이야기가 나오자 윤 씨가 “직접 봐야 안다”며 기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축사로 가는 길, 퀴퀴한 돼지 분뇨 냄새 때문에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축사에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다. 날씬한 돼지라니…. 돼지들은 놀란 기자를, 기자는 윤 씨를 바라봤다.

“아∼ 토종은 원래 안 뚱뚱해요. 얘들이 자기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 오면 놀라서 쳐다봐요.”

몸길이가 1m도 채 안 되는 재래돼지들은 새치나 반점 하나 없이 새카맸다. 꼬리는 ‘삭제’를 뜻하는 원고지 교정부호처럼 말려 있었다. 쫑긋 선 귀 사이로 아담한 코가 보였다. 아주 귀여운 외모였다.

“이마에 ‘내천(川) 자’ 주름이 있는 게 특징인데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게 한국인하고 닮았어요. 외래종은 덩치가 크고 코도 커다란 것이 외국 사람 같고.”

우리나라의 재래돼지는 만주 지역에서 서식하던 돼지 중 이동이 쉬운 소형종이 2000여 년 전 고구려 시대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발간된 ‘조선농업편람’에는 “재래돼지는 털이 흑색으로 체격이 왜소하고 체중은 22.5∼32.5kg이며 비만성은 없으나 체질은 강건하다”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세종 27년·1445년 1월 18일)에는 ‘의정부에서 요동 돼지를 들여와 사육할 것을 건의하다’란 대목이 있다. ‘전에 기르던 제사 소용의 중국 돼지는 토종과 잡종이 되어 몸이 작고 살찌지 않아서 제향에 합당하지 아니하오니, (요동에 들어가는 사람이) 사 가지고 오게 하사이다’란 내용이다.

재래돼지는 덩치는 작지만 잘생긴 외모만큼 맛이 좋다. 윤 씨는 “일반 사람들이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맛에서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했다. 육질이 쫄깃하고 고소한 것이 특징으로 고기를 얼렸다 녹여도 맛이 좋다. 그는 “재래돼지는 근섬유(근육을 구성하는 단위)가 가늘어서 고기가 질기지도, 퍽퍽하지도 않다”며 “보통 질겨서 구이용으로 쓰지 않는 뒷다리도 구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축산과학원에 따르면 재래돼지 고기에는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인 글루탐산(3.3%)이 개량돼지(2.5%)에 비해 많이 포함돼 있다. 홍준기 축산과학원 연구사는 “(재래돼지는) 지방 마블링이 굉장히 좋게 나온다”며 “쉽게 말해 육질이 뛰어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재래돼지는 외래 품종(랜드레이스)보다 고기의 색이 붉으며 살코기 사이의 근섬유 수도 더 많아 육질이 뛰어나다.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 함량도 개량돼지에 비해 많다. 농촌진흥청 제공

도축 비용도 2배

하지만 재래돼지를 둘러싼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다.

“돈이 안 돼요. 지금은 싹 망하고 저희 농장 하나 남았어요. 저희도 돼지가 300마리도 안 됩니다.”

윤 씨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손에 쥔 채 말을 이었다. 재래돼지를 키우던 농가들은 수익성이 낮아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농가는 기르던 재래돼지를 외래 품종의 돼지와 교배시키기도 했다.

현재 순종 재래돼지 종자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심각성 때문에 문화재청은 올해 3월 제주 흑돼지를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했다. 제주 흑돼지는 산우리 농가의 재래돼지와 같은 품종이다.

“수입은 내지도 못하고 1년에 1억 원씩 쏟아 부었어요. 쉬는 날도 없이 사명감 가지고 했는데… 저도 그만 접을까 고민 중입니다.”

재래돼지의 수익성이 좋지 않은 이유는 품종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외래종이나 잡종은 5, 6개월이면 110∼120kg로 크는데 재래돼지는 50∼60kg으로 키우는 데 7개월이 걸린다. 게다가 외래 품종 1마리분의 고기를 얻으려면 2마리를 도축해야 한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윤 씨에 따르면 흰색 외래 품종 돼지의 마리당 가격은 40만 원 정도다. 재래돼지는 한 마리에 30만 원 안팎이다. 그는 “kg당 농장 출하가격으로 보면 재래돼지가 1.5∼2배 비싸다”며 “여기에 도축 비용이 추가로 붙는다”고 말했다. 이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강남의 유명 식당도 다 가봤지만 가격이 안 맞아 팔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게다가 재래돼지의 털은 해외 품종 돼지보다 굵고 깊게 박혀 있어 도축 온도가 다른 돼지보다 3도가량 높아야 털이 제거되는 걸림돌도 있다.



지속적인 품종개량 필요

전문가들은 “경제성에 상관없이 고유한 재래돼지의 품종은 지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축산과학원의 김영화 박사는 “경제성은 맞지 않더라도 재래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품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재래종은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기초 소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재래’나 ‘토종’이라는 단어에는 “수천 년 세월을 거쳐 한반도에 내려져 온 품종”이라는 문화적 가치도 담겨 있다.

축산업계는 재래돼지의 맛을 유지하면서 크기를 키우는 방향으로 개량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육질이 좋고 질병에도 강한 재래돼지의 장점은 살리면서 수익성과 연관된 크기와 성장 속도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이런 노력의 결과가 최근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 축산과학원이 개발한 개량종 ‘난축맛돈’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돼지는 외래종 돼지와 달리 몸 전체의 마블링이 좋아 삼겹살과 목살뿐 아니라 모든 부위를 구이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한우에 비해 돼지의 육종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우는 지속적인 품종 개량 덕분에 1974년 290kg이었던 평균 몸무게(18개월령 수소)가 2015년 현재 550∼560kg으로 불어났다.

돼지 종자 개발은 주로 ‘한방돼지’나 ‘마늘돼지’, ‘녹차돼지’ 등 사료를 이용해 맛있는 돼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 중심으로만 이뤄졌다. 한 돼지 농가 주인은 “먹이로는 돼지의 맛을 차별화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요즘은 품종에 신경을 많이 쓴다”며 “이제는 ‘종의 전쟁’에 신경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정부에서도 재래돼지의 품종을 지키면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홍천=김성모 기자 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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