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올해 초에 발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취미 문화’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축구다. 이 조사는 지난해 10월 전국 만 13세 이상 17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응답자의 18%가 축구를 꼽아 1위에 올랐다. 2위는 등산(13%), 3위는 야구(10%), 4위는 수영(8%), 5위는 걷기(7%)가 차지했다.
사실 요즘 프로스포츠에선 야구의 인기가 축구를 앞서고 있다. 스포츠 전문 채널 시청률에서 프로야구는 1% 안팎을 오르내리지만 프로축구는 0.4% 안팎이다. 야구가 두 배 이상이다. 포털 사이트 문자 중계에서는 야구에 접속하는 팬의 수가 축구보다 5∼10배 많다. 그런데 국민들은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단다. 왜 그럴까.
▼ 鬪 “일본엔 져선 안돼”… 식민지 설움 축구로 달래 ▼
1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돌이켜보면 축구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국민은 열광했다. 국민들은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 때 대표팀의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고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상대를 몰아붙이자 브라질 월드컵 때의 비난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팬들의 열광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축구대표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있었다.
그동안 한국대표팀을 맡았던 외국인 감독들은 한국인들이 축구대표팀에 보이는 열정에 대해 “놀랍다”거나 “특이하다”고 했다. 아시안컵에서 한국팀을 이끈 울리 슈틸리케 감독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대표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엄청나다”고 표현했다. 평생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온 이들의 눈에도 한국축구대표팀에 쏟아지는 열정은 너무도 뜨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국민에게 국가대표팀 간 축구 경기는 절대로 가볍게 치를 수 있는 경기가 아니다. 국민적인 ‘축구 영웅’도 몇 번의 패배로 ‘역적’이 된다. 축구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한민국 국민의 축구 유전자(DNA)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54년 3월 한국에서는 스위스 월드컵 최종 예선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한국은 일본과 홈 앤드 어웨이로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을 치러야 했는데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놈들이 한국 땅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일전의 국내 개최를 불허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에 가서 패하면 나라 망신”이라며 방문경기도 못하게 했다.
1934년 평양기림리운동장에서 열린 경평축구 대회에 참가한 선수단과 관계자들이 찍은 기념사진.
1935년 서울에서 열린 경평축구에 참가한 선수들.
같은 해 열린 메이지신궁대회에서는 경성축구단이 결승에서 게이오대를 2-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이후 메이지신궁대회에서는 1939년 함흥축구단이 게이오대를 3-0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후용구락부를 6-0으로 제압하고 2연속 우승하는 등 조선 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조선인들은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1936년 이후 1942년까지 7년 동안 일제의 극심한 조선인 차별 속에서도 38명이 일본축구대표팀에서 활약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선수들이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경평축구’가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도시인 경성(서울)과 평양엔 많은 축구단(‘구락부’)이 있었다. 구단끼리 치르는 친선경기엔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쳤다. 양 도시는 서로 조선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축구에서도 라이벌 의식이 대단했다. 1929년 10월 휘문고보에서 열렸던 경평축구는 다양한 형식으로 1935년 4월까지 이어졌다.
한국대표팀의 최정민과 정남식, 우상권(왼쪽 위부터)이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과의 스위스 월드컵 최종예선 1차전에서 골문으로 쇄도하고 있다. 한국은 광복 후 처음 열린 한일전에서 최정민이 2골을 터뜨리고 정남식, 최광석, 성낙운이 1골씩 보태 5-1로 대승을 거뒀다. 이재형 베스트일레븐 이사(축구자료수집가) 제공
1985년 11월 3일 열린 일본과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2차전에서 한국의 허정무(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가 골을 터뜨리자 팬들이 열광하고 있다. 한국이 1-0으로 이겼고 1, 2차전 합계 2승으로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랐다. 동아일보DB
40승 22무 14패. 역대 한일전에서 한국은 절대 우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이 한일전에서 어떤 각오로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대 한일전 중 손꼽히는 3경기가 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최종예선과 1985년 열린 1986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 그리고 1993년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이다.
1985년 홈 앤드 어웨이로 열린 한일전은 한국이나 일본에 더없이 중요한 일전이었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다시 월드컵 본선에 도전하고 있었고 일본은 사상 첫 월드컵 본선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선수로 활약했던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의 회고다.
“역대 한일전 중에서도 그렇게 관심을 모은 경기가 없었다. 한일 정기전을 해왔지만 그것은 그저 평가전 성격이었다. 월드컵이란 대사를 앞두고 열린 1985년의 한일전은 한국과 일본 국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사였다. 선수들도 총만 들지 않았지 전쟁과 다름없는 경기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한일전을 5차례 이상 치렀지만 그때처럼 간절하게 승리를 원한 적은 없었다.”
한국은 방문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안방에서 1-0으로 이겨 32년 만의 월드컵 진출이란 쾌거를 이뤘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은 한국에는 ‘도하의 기적’, 일본에는 ‘도하의 비극’으로 끝났다.
당시 최종예선에 나선 한국 일본 북한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6개 팀 중 2팀이 본선에 진출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에 0-1로 지면서 한국은 1승 2무 1패를 기록해 자력 진출이 힘든 상황이 됐다. 한국은 마지막 북한과의 경기에서 2골 차 이상으로 이기고, 일본이 이라크와 비기거나 패해야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 마지막 경기인 한국과 북한, 일본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기가 1993년 10월 28일 각각의 경기장에서 동시에 치러졌다.
한국은 북한을 3-0으로 꺾었지만 아무도 승리의 환호성을 터뜨리지 못했다. 이겼으되 이긴 게 아닌 경기였다. 최종 성적 2승 2무 1패.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선수들은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일본이 이라크에 2-1로 앞서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 종료 10초 전 이라크의 오만 자파르가 동점골을 기록한 것이다.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가 조 1위, 한국이 조 2위로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한국을 꺾으면서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일본으로선 결국 4년 뒤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야 처음 월드컵 본선을 경험하게 됐다.
한국과 일본의 경쟁의식은 일본 축구 발전에도 기여했다. 일본은 한국에 계속 패하자 1972년부터 한일 정기전을 열자는 제안을 해왔다. 1991년까지 15차례의 정기전을 치렀다. 이를 통해 일본 축구계도 다양한 발전방향을 모색했다. 한동안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던 한국이 1983년 프로축구 리그를 출범시킨 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오르자 일본도 1993년 프로축구 J리그를 출범시켰다. 한국에 10년이나 뒤졌다. 하지만 일본은 체계적으로 J리그를 준비했고 꾸준히 축구 수준을 성장시켰다. 일본은 1992년 돌연 한일 정기전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자신들은 세계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에 머물지 않겠다는 게 한일 정기전 취소의 이유였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저력을 인정한 때문인지 일본은 최근 다시 한일 정기전을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한국은 한일 정기전 부활의 여러 측면을 고려 중이며 아직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다.
▼ 魂 막오른 러 월드컵 2차예선… 서서히 뛰는 가슴 ▼
한국 축구의 간판스타였던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이 1972년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에서 우승하고 귀국한 뒤 김포공항에서 찍은 기념사진. 당시 차 전 감독은 19세 막내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아 화제를 모았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 장운수 당시 경신고 감독, 차 전 감독, 차 전 감독 아버지와 어머니. 차 전 감독과 김 전 이사는 경신고 동문으로 당시 함께 선수로 출전했다. 이재형 이사 제공
한일전은 숱한 스타와 비난의 대상을 동시에 만들었다. ‘차붐’ 차범근 전 수원 감독은 1975년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에서 최초로 한일전 해트트릭을 기록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1985년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 방문경기에서 골을 터뜨려 2-1 승리를 주도한 정용환과 이태호, 안방에서 결승골을 터뜨려 1-0 승리를 견인한 허정무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도 한일전이 낳은 스타였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 8강에서 2골을 터뜨려 3-2 승리를 이끈 ‘황새’ 황선홍, 1997년 ‘도쿄대첩’ 결승골을 넣은 이민성, 2010년 일본을 상대로 골을 넣고 보란 듯이 유유하게 상대팀 응원석 앞을 거닐었던 ‘산책 세리머니’의 박지성, 2003년 도쿄에서 웃옷을 벗어 문신을 보여주는 세리머니를 한 안정환도 한일전 스타로 꼽힌다.
함흥철 전 대표팀 감독은 1978년 메르데카컵과 킹스컵, 방콕 아시아경기 3관왕을 이끌었지만 이듬해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1-2로 패해 일순간 사령탑에서 물러나야 했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0-1로 진 김호 전 대표팀 감독도 비난의 표적이었다. ‘도하의 기적’이 없었다면 김 감독은 그대로 경질됐을 분위기였다.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은 2012년 8월 일본 삿포로에서 0-3으로 완패한 게 빌미가 돼 결국 사령탑에서 쫓겨났다.
한일전을 통해 싹이 튼 ‘축구 DNA’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다른 국제 축구대회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한일전만큼은 아니지만 1970, 1980년대 메르데카컵과 킹스컵도 대한민국 국민을 열광하게 한 대회다. 이 대회들은 나중에 한국이 만든 박스컵과 함께 국내에서 ‘아시아 3대 축구 이벤트’로 여겨졌다. 우승하면 김포공항에서 선수단 환영식을 한 뒤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청와대 방문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국제 축구대회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세계 최고의 축구무대인 월드컵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열망은 종종 분노로 뒤바뀌어 나타나기도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하자 한국 축구의 전설인 차범근 대표팀 감독이 대회 도중 현장에서 경질됐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감독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극심한 비난의 표적이 됐다.
프랭클린 포어는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2004년)라는 책에서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과 야만의 전쟁터”라고 말했다. 이글거리는 눈과 사나운 태클, 땀과 피가 튀는 몸싸움이 축구의 매력이지만 이런 모습 자체가 인간세상의 소름 끼치는 본질이라는 얘기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본거지로 하는 셀틱과 레인저스 구단의 팬들은 경기장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노래를 외친다. 여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 갈등에 오랜 지역감정이 중첩돼 있다.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에서 축구장은 그 자체가 싸움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맞붙는 ‘엘 클라시코’는 카탈루냐와 카스티야 지역의 대리전쟁이라고까지 불린다.
월드컵 축구가 지구촌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국 국민들은 자국 팀을 응원하며 한껏 내셔널리즘(민족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인생 및 세상사의 각축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사가 투영되고 있는 축구에는 이렇듯 지역별 문화별로 다양한 의미와 현상이 얽혀 있다. 오랫동안 상관관계 속에 놓인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도 축구는 ‘축구’일 수만은 없었다. 이는 비단 한일전에서뿐 아니라 남북 축구 대결에서도 그랬다. 더 나아가 축구대표팀의 많은 경기에서 한국 팬들은 축구 이상의 것을 보아온 것은 아닐까.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6월부터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을 시작한다. 팬들의 가슴도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다.
양종구 yjongk@donga.com·이승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