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아버지’ 故 새뮤얼 A 모펫 목사의 손자 찰스 B 모펫 씨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를 쓴 고 새뮤얼 A 모펫 목사의 손자 찰스 B 모펫 씨(가운데)가 아내 조애나 씨(오른쪽), 한국인 입양아들 대니얼 씨와 함께 한국을 다녀갔다. 찰스 씨 가족이 9일 서울 중구 소파로 숭의마펫기념교회 헌당예배 후 포즈를 취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찰스 B 모펫 씨의 아버지인 고 하워드 F 모펫 씨(오른쪽)와 어머니 고 델라 모펫 씨의 생전 모습. 집 응접실 벽면에 엘리자베스 키스 작가의 한국 그림들이 걸려있다. 찰스 B 모펫 씨 제공
10일 오후 6시 반. 찰스 씨와 그의 아내 조애나 씨가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약속 장소를 서울 중구 소공로 조선호텔의 나인스게이트그릴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유리창 너머로 해가 지는 환구단(조선 고종 때 제단)이 보였다.
1891년 새뮤얼 A 모펫 목사가 평양 땅에서 노상 전도하던 모습. 숭의마펫기념교회 제공
“조애나, 알아요? 한국전쟁 때 이 호텔이 미군 본부로 사용됐어요. 우리가 신혼여행 때 점심 식사를 한 곳이기도 하고요.” 중국에 살던 찰스 씨 가족은 선교사 가족이라는 이유로 1948년 공산당으로부터 쫓겨나 서울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대구로 내려가 살았다. 찰스 씨는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1981년 신혼여행으로 한 달간 한국을 여행하며 모펫가(家)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찰스 씨는 지갑에서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와 아내, 한국인 자녀 세 명이었다. “큰딸 로라예요. 지금 미국 워싱턴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해요. 의사였던 아버지(하워드 모펫)가 하늘나라에서 흐뭇해하실 거예요.”
수많은 6·25전쟁 고아, 환자들과 함께 자란 찰스 씨는 조애나 씨와 약혼 때부터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한다는 뜻을 모았다. 그렇게 한국인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키웠다. 30세 로라, 27세 대니얼, 19세 줄리아다.
막내 줄리아는 찰스 씨 부부가 나온 미 일리노이 주의 명문 기독사학인 휘턴대 1학년으로, 케이팝(K-pop) 팬이다. 찰스 씨의 장인은 휘턴대에서 55년간 물리학과 교수로 일했다.
조애나 씨가 말했다. “어려웠던 때도, 행복했던 때도 입양은 우리 인생에 훌륭한 경험과 사랑이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딱 5분만 마음의 문을 열고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엔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아주 많다는 걸요.”
그동안 다른 초기 선교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새뮤얼 A 모펫 목사에 대한 재조명이 진행 중이다. 옥성득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는 모펫가 사람들의 편지와 각종 기록을 모아 671페이지 분량의 ‘마포삼열 서한집’(두란노 아카데미·2011년)을 펴냈다.
모펫 가문은 동아일보와도 인연이 깊다. 모펫 목사가 세운 평양 학교들의 서울 재건을 추진한 고 박현숙 여사(1896∼1980·제4, 6대 국회의원)의 남편은 고 김성업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지국은 식민지 민중의 여론을 대변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다음 날 모펫 목사의 축사를 지면에 실었다. 모펫 목사는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105인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조부, 평양에 학교 세우고 복음 전파
찰스 씨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환구단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찰스 씨에게 무엇을 물려줬을까.
“5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60대 남자분이 절 찾아왔습니다. 전신 화상을 입고 치료비가 없을 때 아버지가 다섯 달 동안 무료로 치료해 주셨답니다. 당시 고마워서 사과 몇 개를 아버지께 드렸다면서 제게 제주의 생수를 감사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물 맛이 참 맛있었습니다. 아, 또 있군요. 한국전쟁 때 남한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어릴 적 평양에 살아 지리에 밝은 아버지가 성경책을 들고 앞장섰더니 평양 주민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 혹시 마 목사님 아느냐’고 물었답니다. ‘네, 마 목사님이 제 아버님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이 ‘마 목사님 아들이 왔다’고 환호성을 질렀답니다. 이보다 더 큰 유산이 있을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배웠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세상을 뜬 지 67년 만인 2006년 미국에서부터 서울 장신대로 이장됐고, 아버지는 2013년 자신의 유언대로 동산의료원 내 은혜정원에 잠들었다.
이젠 한국이 세계에 베풀 차례
찰스 씨의 앞으로 계획이 궁금해졌다.
“한국인들이 제 할아버지를 ‘길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별명처럼 불렀다고 합니다. 저도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며 그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훗날엔 제 몸의 3분의 1은 평양에, 3분의 1은 대구에, 3분의 1은 휘턴대에 묻히고 싶습니다.” 평양은 그의 할아버지가 복음을 전파한 곳, 대구는 아버지가 헌신한 곳, 휘턴대는 그와 가족들이 다닌 학교다.
아내 조애나 씨는 어릴 적 케냐, 나이지리아 등에서 살았다. 물리학 박사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일부러 오지를 찾아다니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말했다.
“한국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에 유리합니다. 힘든 시절을 겪은 후 놀랍게 성장했기 때문에 넓은 이해심으로 도울 수 있잖아요. 이젠 세계가 한국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이 사랑을 베풀 차례이자 기회입니다.”
찰스 씨는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성경책을 이번에 ‘숭의마펫기념교회’에 기증했다. 평양, 중국, 아프리카 등을 다니며 낡아진 책이다. 그는 “이 성경을 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자들을 돕는 마음을 갖기 바란다”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평생 간절히 기도했고, 그것은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18일 찰스 씨가 한국 여정을 마치고 시카고 집에 잘 도착했다는 안부 e메일을 보내왔다. 첨부한 사진은 살아계실 적의 부모님이 응접실에서 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찰스 씨는 이 사진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뒤에 걸린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가 조선의 공주를 그린 거예요.” 영국 출신의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는 1919년 한국에 처음 와서 남다른 애정으로 한국을 그렸던 화가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한국을 향한 사랑이 나를 숙연케 했다.
열흘 전 찰스 씨 부부는 나와 헤어진 후 춘사월 달이 비추는 환구단 주변을 한참 동안 거닐었다고 조선호텔 관계자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전 세계 아이들에게 부채춤을 가르쳐 주고 싶다면서 부채를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도 물었다고 했다. 예쁜 부채를 꼭 구해서 그들에게 보내 주겠다는 작은 계획이 내게 생겼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