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구를 위해 술을 마시나’
나는 분명 술을 어른에게 배웠다. 고2 겨울방학 때 다섯 살 많은 대학생 형이 부모님의 허락과 입회 아래 술의 세계에 입문시켜줬다. 고3 입시지옥을 앞둔 동생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위로주(慰勞酒)’. 난 그 첫술을 이겨내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꾸벅꾸벅 조는 버릇이 그때 형성된 것 같다. 사회생활하면서도 일보다 술이 육체적으로 더 힘들었다. 과로(過勞)는 견디겠는데 과음(過飮)은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과로와 과음, 두 가지를 모두 완벽히 해내는 초인 같은 선배들이 그저 경이로웠다. 아내가 술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못 먹는 술 좀 적당히 먹어요”라고 잔소리하면 내 대꾸는 늘 “내가 먹고 싶어서 먹니”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흡연율은 조금씩 감소하는데 음주율은 오히려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2014년 지역사회 건강조사 결과에 따르면 월간 음주율(최근 1년 동안 한 달에 1회 이상 계속 음주한 사람의 비율)이 지난해 60.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8년(54.1%)보다 6.7%포인트 증가했다.
“미국 기업에선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걸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음주는 자기 쾌락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selfish) 행동’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건 자기 절제를 못한다는 뜻이 된다. 한국은 완전히 다른 문화다. 직장에서 회식을 하면 2차, 3차, 끝까지 가면서 상사도, 부하 직원도 다같이 취한다. 술 취한 모습이 큰 흉이 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주는 조직의 단합을 위해, 회사의 발전을 위해, 궁극적으로 (회사 잘 다녀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이타적인(selfless) 행동’이기 때문이다.”
J는 “당신이 술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아내가 꿀물 타주면서 보살펴주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그랬다”고 하자 “당신의 음주를 ‘selfish’하지 않고 ‘selfless’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타적 음주’ 개념을 인식하기 전까진 밤마다 광화문 여의도 강남역 일대에 쏟아져 나오는 양복 차림의 수많은 취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J의 말처럼 미국은 음주를 보는 시선이 한국과 크게 다르다. 미 유력지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술꾼과 마약류 복용자의 직장 내 생산성 저하 문제’를 보도했다. 결근이 잦거나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골칫거리란 내용보다 술꾼을 마약류 복용자와 같이 다룬 것이 내겐 더 충격이었다.
한국의 증가하는 음주율이 이타적 음주 인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술을 권하고, 술을 부르는 주·객관적 다른 이유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쯤 ‘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술을 마시는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잘 못 먹는 술’을 끊은 지 올해로 4년째. 미국 땅에서도 한국 분들을 만나면 “술 안 먹고 어떻게 ‘일’을 하나”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내가 금주를 결심한 건 ‘술이 일을 방해하는 순간’을 심신으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난 지금 일을 위해,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 ‘이타적 금주’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