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공화국]녹취 전성시대 천태만상
○ 지금 당신은 녹취 중?
올해 3월 방산 비리로 구속된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66). 구속 전 이 회장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건 무기중개사업 로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여성 연예인 클라라(본명 이성민·29)와의 갈등이었다.
클라라가 녹취에 당했다면 모델 에이전시 대표 B 씨는 녹취로 ‘구사일생’한 경우다. B 씨는 대형 제화업체와 유명 남성 연예인의 상품권 광고계약 중개를 맡았다. 그는 연예인 소속사로부터 “6개월 계약에 2억5000만 원”이라는 조건을 전화로 통보받아 광고주에게 전했다. 해당 광고주는 B 씨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소속사가 다른 에이전시에 ‘1억7000만 원’으로 말했다는데 B 씨가 중간에서 금액을 부풀린 게 아니냐”는 것. 자칫 20년 넘게 거래한 광고주와의 관계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B 씨는 가까스로 소속사 관계자와 통화한 내용을 공개해 결백을 입증했다.
○ 스파이앱 등 불법도 성행
버튼 하나만 누르면 녹취가 가능한 세상이다 보니 이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에 따르면 다른 사람 간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진다. 하지만 자신이 참여한 대화의 녹취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불법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해에만 46만 명이 통비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 이모 씨(54)는 2013년 2월부터 자택의 TV 장식장 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밖에서 집 안의 대화를 엿들었다. 2년에 걸쳐 대화를 엿들었지만 불륜 증거를 잡지 못했고, 도청기와 녹음기가 아내에게 발각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2년에 처해졌다.
직장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법 녹취가 성행한다. 사장과 직원이 서로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거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사무실 곳곳에 녹음기를 설치하다 적발된 사례가 적지 않다. 치과병원장 김모 씨(46)는 병원 여직원과 퇴직금 중간정산 문제로 시비가 붙자 동태를 살피려고 여자 탈의실에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 형태의 녹음기를 화장지 박스 안에 설치했다가 적발됐다.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 사장은 직원들이 고객을 다른 업체로 빼돌리는지 감시하기 위해 사무실 화장실 형광등 안에 녹음기를 설치했다가 들통 나기도 했다. 수도권의 한 시립어린이집 교사는 노동단체에 가입한 뒤 원장과 근로조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원장 책상 밑에 녹취용 스마트폰을 숨겨놨다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이 내려졌다.
○ 녹취 푸는 속기사 ‘인기몰이’
녹취가 일상이 되고 각종 법적 다툼 때 유력한 증거물이 되면서 법조계에선 속기사가 수혜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속기사는 녹음 파일을 문서로 풀어주고 법정에 증거로 제출해 준다. 법조타운인 서울 서초동에만 속기사 사무실이 30∼40곳 몰려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가기술자격증인 한글속기 1∼3급 지원자는 2011년 4726명에서 2012년 6004명, 2013년 7018명, 2014년 8602명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녹음 파일을 문서로 풀어내는 비용은 1시간에 25만∼30만 원 수준. 김수경 속기법인 대한 대표는 “이전에는 가방이나 옷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 녹취해 품질이 좋지 않았는데 요즘엔 스마트폰 통화 녹취가 보편화돼 녹취 없는 소송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