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공화국]부작용 줄일 해법은 없나
전문가들의 시선은 엇갈린다. “자기 방어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는 주장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다른 나라보다 녹취에 너그러운 편”이라는 해석에 대부분의 전문가가 공감했다.
○ 불신이 만든 ‘녹취공화국’
그러나 녹취 일상화를 단순 하드웨어 차원으로만 풀이하는 건 단편적인 접근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많은 전문가는 녹취 일상화의 원인으로 ‘신뢰의 부족’을 꼽았다. 사회 전반적으로 불신이 커지면서 녹취를 통해 ‘최후의 물증’을 남기려는 성향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다. 박경애 광운대 교육대학원 원장은 “한국 사회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인식이 불신 사회를 만들었다”며 녹취 의존도가 높아지는 이유를 풀이했다.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재판 과정을 잘 살펴보면 (증인이) 위증을 할 것이라는 인식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한국은 증인이 진술해도 진실이라는 믿음이 약한 편”이라며 “신뢰 수준이 높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녹취에 기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알 권리가 더욱 강조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둔감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법영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언론을 비롯해 전체 사회가 알 권리를 앞세우다 보니 개인 사생활 침해, 명예훼손 등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 은밀한 내용이나 생생한 현장이 수록된 CCTV와 블랙박스 영상 등을 자주 접하면서 녹취에 대한 일반인의 심리적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해석이다.
○ 새로운 ‘녹취 기준’ 필요
사회 전반적으로 녹취 의존도가 높아지자 부작용을 줄일 새로운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통신비밀보호법이 있다. 이 법률에 따르면 대화 당사자가 대화 내용을 녹취하는 것은 별다른 제재 근거가 없다. 녹취를 둘러싼 문제들이 대부분 양자 간의 대화 녹취 과정에서 불거지는 만큼 일부 전문가는 상대방의 동의를 미리 구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대방의 동의, 인식 없이 무분별하게 녹취하는 행위는 법감정에 맞지 않다고 본다”며 “(대화 상대방의 동의에 대해) 법률적인 통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법적 규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률에 앞서 사회적 기준 마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법적 규제와 별도로 녹취와 관련해 사회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교양 차원에서 문제 해결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라이버시 침해와 관련된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강제로 셔터 소리가 나는 것처럼 상대방이 녹음 여부를 알 수 있는 기술을 내장해 역기능을 막는 식이다.
○ ‘최후의 수단’ 보장
개인의 권리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녹취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2013년 불거진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는 녹취를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한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이슈의 도화선이 된 것은 물건을 강매하며 욕설을 퍼부은 본사 직원의 목소리가 담긴 2분 45초 분량의 통화 녹취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금융상품 등 기업의 서비스 안내를 받을 때 증거 확보 차원에서 그 내용을 녹음해두는 소비자도 점점 늘고 있다. 직장인 노모 씨(36·여)는 최근 한 은행에서 40만 원에 달하는 신용카드 부가서비스 요금을 청구받았다. 과거 은행 측의 마케팅 전화를 받았던 노 씨는 “해당 서비스에는 별도 요금이 없다”는 당시 은행 직원의 통화 녹취를 제시한 뒤 환불받았다. 그는 “은행 측이 처음에 환불을 거절했지만 ‘나도 통화 내용을 녹음했다’고 말하자 태도가 달라졌다”며 “같은 서비스에 가입하고도 녹음 기록이 없어 구제받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홍구 windup@donga.com·임보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