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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철밥통 기득권 못 깨는 저신뢰 정치

입력 | 2015-04-29 03:00:00

정규직 철밥통과 공무원 연금…뜯어고치지 않으면
세계 2위 계층간 불평등 더 악화
성완종 비타 500상자와 정치인들의 연이은 거짓말로
기득권 세력 설득할 권위 상실
사회적 신뢰와 공감에 기초해 협력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경제위기 극복도 가능하다




황호택 논설주간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정치인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그 거짓말이 무너지면 그것을 추스르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심증(心證)으로 진실을 알아버렸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성 빈곤은 총리감 하나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총리감을 기껏 구해놓으면 청문회도 열기 전에 다 무너지고 국회 인준을 가까스로 통과한 정치인 총리는 69일 만에 울먹이면서 청사를 떠났다.

‘리스트’와 ‘게이트’라는 폭풍이 정치권을 수없이 강타했지만 이번에 보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경제 수준이 세계 15위권 안에 드는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정치 불신이 심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지난해 6월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의회의 신뢰도는 7%에 불과했다. 민주당 공화당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국정이 표류하고 미국 의회는 로비스트들의 포로가 됐다는 국민 인식이 의회의 신뢰도를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보다도 못하다. 각종 연구기관의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 의회는 조사 대상 기관에서 항상 꼴찌고 미국 의회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국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주도해야 할 영역이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영역으로 낙인찍혀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최대 현안은 노동 개혁과 공무원연금 개혁이다. 우선 정치권과 사회지도층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다해야 대기업 노조와 공무원에게 철밥통을 내려놓으라고 설득할 수 있는 권위가 생길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개혁을 외친들 기득권 세력이 특권을 내려놓는 자발성이 우러날 수 없다.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는 징후가 짙어지고 있다. 더욱이 한국경제가 정부가 내놓은 단기 부양책만으로는 장기 침체의 늪에서 탈출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김태준 동덕여대 교수(국제경영학)는 “우리 사회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산층을 두껍게 해주고 계층 간 불평등을 줄여나가야 사회적 신뢰와 공감에 기초해 국민 모두가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선진경제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계층 간 불평등이 미국 다음으로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소득·세제 관련 동향을 발표할 때 참고하는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세계 상위소득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상위 10% 계층의 소득 점유율은 2012년 기준 미국은 48.2%이고 한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인 44.9%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는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하는 대표적 사례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수준을 100으로 할 때 중소기업 정규직은 53.8,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6.7이다. 이러니 대학 졸업자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 같은 버젓한 일자리를 원하고 그래야 시집 장가를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년마다 잘리는 비정규직은 ‘루저’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결혼하기도 힘들고 아이 낳기도 겁나 저출산으로 이어진다.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자면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가 필요하지만 기득권의 본산인 민주노총은 노동 개혁과 공무원연금 개혁에 결사반대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로 관존민비(官尊民卑)의 공무원연금은 국민 세금으로 하루에 100억 원씩 적자를 보전해줘야 지탱한다. 공무원은 60세 정년을 채우고 퇴직해서 관(官)피아로 내려가 3년 이상 버티고 풍족한 연금으로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다. 이러니 모든 젊은이가 창업이나 진취적 도전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느라 비전 없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시대에는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권위와 큰소리 한마디로 문제가 해결됐다. 국가적으로 볼 때도 박정희 대통령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국가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권위적인 방식으로나마 국민 통합을 이끌어냈기에 경제 발전으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런 권위적인 리더십이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가정에서도 가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권위는 설 자리가 없다.

이번 사건이 그저 성 회장의 비타500 상자를 받은 사람 몇 명 더 밝혀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정경유착을 바로잡는 정치 개혁으로 이어져야 의미가 있다. 그래야만 정부와 정치권이 철밥통 계층을 설득해 개혁을 선도해 나가는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