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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빛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 새 삶의 등불로 돌아왔다

입력 | 2015-04-30 03:00:00


국내 유일의 개인 안(眼)은행을 운영하는 정영택 온누리안과병원 원장(55). 정 원장은 “시력교정술은 삶을 편하게 하지만, 각막이식술은 삶 그 자체를 선물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올해 10년째를 맞은 온누리 안은행을 통해 시력을 되찾은 사람은 400명이 넘는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우리 아들 눈 좀 뽑아가 주세요. 제발….”

2010년 7월.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자식의 죽음을 확인한 A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 신입생인 A 씨의 아들이 전북 부안의 계곡에서 놀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 사망한 지 4시간이 지났다. 그 정도 시간이면 각막도 손상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A 씨의 간절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황망하게 죽은 우리 아들이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면 억울함이 좀 풀어질까 해서요. 또 모르죠. 나중에 유전자 기술이 발달하면 남의 몸에 붙어 있던 세포 일부를 떼어서라도 우리 아들을 다시 만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차를 돌려 영안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각막의 손상은 없었다. 고인 앞에 기도를 한 뒤 조심스럽게 안구를 빼냈다. ‘안(眼)은행’에 보관된 이 청년의 각막은 며칠 뒤 앞을 보지 못하던 한 중년 남성에게 이식됐다.

내 이름은 정영택(55). 망치질, 톱질이 재미있어 의사가 되려고 했던 ‘괴짜 촌놈’이다. 전북대 의대 교수로 있다가 도중에 관두고 전주에서 ‘온누리안과’라는 개인 병원을 열었다. 최근엔 서울 강남 한복판에 분점까지 냈다. 요새는 ‘안과’가 고소득 전공으로 인기가 높지만, 옛날엔 달랐다. 제대로 된 현미경이 없어 안과수술이 거의 없었을 때였다. “야근 없고, 편한 전공을 택하면 좋겠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고른 게 안과다.

그녀의 바람처럼 내가 편한 삶을 살게 됐을까. 올해 30년째 안과의사를 하면서 나는 각막이식술만 수백 건을 했다. 대학병원에 근무할 때는 한 해 전국에서 이뤄진 각막이식술 600건 중 내가 한 것이 60건을 차지하기도 했다. ‘각막이식’에 흥미를 붙인 나는 개업을 하고선 국내 유일의 ‘개인 안(眼)은행’을 열었다. 각막을 직접 기증받아 내 환자들을 수술하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2005년 국내에서 처음 세운 이 안구은행은 올해 10년을 맞았다.

○ 전라도 촌놈, ‘눈알기계’ 만나다

전북대병원 안과 전공의로 일하던 1991년 4월.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안구 수술용 기기 박람회’의 초청을 받았다. 내가 얼마나 촌놈이었는지 꽃 피는 4월에 우중충한 패딩 점퍼를 입고 서울에 올라왔다. 세련된 정장을 입은 서울 의사들 사이에 내가 서 있으니 안내요원이 신분을 확인하며 출입을 막았다. “나 전주에서 온 안과의사요” 하고 소개를 하니 그제야 길을 터줬다. 촌스러운 옷을 입고 서울 의사들과 사교모임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시력교정 의료기기인 ‘엑시머 레이저’가 전시됐다. 당시만 해도 초고속 레이저 기기다. 예쁘게 화장한 아가씨들이 일렬로 서서 소개하는 각종 의료기기들도 신세계였다. 머리카락보다 얇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까지 볼 수 있는 초정밀 현미경. 외국에선 이 기기로 사람의 눈을 고쳐준다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안과수술력은 한참 낙후된 상태였다. 녹내장, 백내장 등 정교한 수술을 할 의료기기조차 없었다. 안구 통증이 심하면, 환자의 눈을 고치는 대신 뽑아내 버릴 정도였다.

전북대병원에 돌아온 내 머릿속엔 ‘눈알기기’가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그 시기 선배들이 줄줄이 퇴사하면서 나는 전공의 때부터 백내장, 녹내장 수술을 한 해 100건 이상 하게 됐다. 이후 우리 병원에도 초정밀 안과수술 기기들이 들어오면서 나는 휴일을 포기하고 수술에 매달렸다.

각막이식을 배운 것도 그때부터다. 기독교인인 나는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시력을 교정하는 건 ‘인생의 편리함’을 선물하는 것이지만, 눈을 뜨게 하는 건 ‘인생’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각막이식만큼은 1등이 되고 싶어 휴일도 반납하고 수술과 연구에 매달렸다. “전라도에 각막수술 잘하는 놈이 있다”는 입소문이 차츰 나기 시작했다.

○ 난생처음 버스를 혼자 탄 시각장애 여성

“형, 우리 병원에 ‘개인 안은행’ 차리고 싶은데….”

“미쳤어? 1년에 억대로 손해 볼 거다.”

‘의무복무’ 같았던 대학병원 생활을 마친 뒤 2005년 9월 전주에 ‘온누리안과’를 개업했다. 시력교정술만 하면서 돈을 긁어모을 수도 있었지만, ‘각막이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각막이식을 하기 위해 찾아온 환자들도 많았다. 우리나라에는 개인 병원이 ‘안은행’을 설치한 경우는 없다. 주변 선배들은 하나같이 말렸지만, 개업한 지 3개월 만에 결국 국내 유일의 ‘개인병원 안은행’을 열었다.

온누리안과 안은행 10년째. 이곳에서 각막이식을 통해 400명 넘는 환자가 시력을 되찾았다. 이 중 기억에 가장 남는 환자는 심정인(가명) 씨다. 아주 어릴 때 시력을 잃은 그녀는 강제결혼을 해 일꾼처럼 평생을 살았다.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앞이 안 보이는 심 씨를 두들겨 팼다. 심 씨는 도망가다 잡힐 두려움에 평생 남편을 ‘주인님’으로 모시며 노예로 지냈다.

그녀가 안과를 찾은 나이는 65세. 회사 다니던 아들이 어머니 평생의 한을 풀어주겠다며 ‘각막이식술’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당시 그녀의 눈 상태는 ‘전맹(全盲)’으로 빛을 지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시신경은 살아 있어 손상된 각막과 백내장을 치료하면 앞을 보는 게 가능했다. 심 씨는 오른쪽 눈에 각막이식을 받아 시력을 되찾았다.

내가 심 씨의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된 것은 수술을 하고 난 뒤다. 수술 경과를 점검하기 위해 병원에 온 그녀는 품에 각종 곡식과 나물을 잔뜩 안고 나타났다. 할머니는 내 자리에 와 손을 꼭 잡고, 껴안더니 연신 볼을 비벼댔다.

“오늘 내가 버스를 혼자 타고 왔어요. 그리고 어제는 나한테 욕을 퍼붓는 남편에게 난생처음 대들기도 했지요.”

각막이식은 염증 제거, 통증 완화, 각막 교체 등 여러 단계를 거치는 ‘종합예술’이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따르는 수술이다. 그래도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이유는 심 할머니처럼 ‘시력’을 찾고 ‘제2의 인생’도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신도 아닌 내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꾼 것 아닌가. 시력을 회복한 이들의 환한 미소가 내 힘든 나날을 잊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

○ 찾는 사람 많은데, 기증은 제자리

기증자의 안구를 보관하는 전주 온누리안과병원의 ‘안은행 냉장고’. 이곳 직원들은 기증자의 숭고한 뜻을 기려 “안구를 ‘모신다’”고 표현한다. 전주 온누리안과병원 제공

“지금 안구가 도착했습니다.”

올 3월 우리 병원 안구은행에 각막이 접수됐다. 우리 병원 수술을 기다리는 응급환자가 없어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10분도 안 되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문자메시지에 휴대전화가 터질 지경이었다. 각막이식을 한다고 모두 앞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은 줄을 잇는다.

안과에서는 실명한 눈을 고층에서 떨어뜨린 카메라에 비유한다. 렌즈 역할을 하는 각막에 작은 흠이 났다고 해서 실명이 되진 않는다. 이 상처 사이로 바이러스가 감염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바이러스는 안구 안쪽을 파고들면서 안압을 높이고, 통증을 유발하다가 급기야 실명에 이르게 만든다. 카메라 렌즈만 바꾼다고 해서 수리가 끝나는 게 아닌 것처럼, 안구 내부에 쌓인 염증과 통증을 제거하고 각막을 옮겨 심어야 수술이 완전히 끝난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각막기증’은 필수다. 각막이식은 다른 장기이식에 비해 부작용이 적고, 간편하다. 혈액형이 달라도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이식이 가능하다. 요새는 영안실까지 이송이 신속하게 이뤄지는 편이라, 사망 뒤 길게는 12시간이 넘어도 각막을 건강한 상태로 이식할 수 있다.

물론 신체의 일부를 기증한다는 것은 가족이나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안과전문의인 나에게도 쉽지 않다.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 두 손으로 어머니의 안구를 적출할 자신이 없어 한참을 울었다. 나의 각막은 자신 있게 기부할 수 있지만, 가족의 각막을 기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결정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알기에 고인의 각막을 ‘안은행’에 보관할 땐 “안구를 모신다”고 표현한다.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은 15만 명. 이 중에서 각막이식이 필요한 환자는 약 10%인 1만5000명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경우, 각막이식 수술 건수가 한 해 1만5000건이지만 우리나라는 1000건도 안 된다. 전문의료기관도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 병원 중 각막이식을 할 수 있는 병원으로 등록된 곳은 20여 곳인데 1년에 30건 이상 각막이식을 하는 곳은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5, 6곳뿐이다.

이렇게 수술 건수가 저조한 것은 국내 각막기증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급할 땐 각막을 수입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장기이식관리센터에서 집계를 시작한 2000년 각막이식은 총 204건이었다. 이후 가장 많을 때인 2009년 662건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매년 들쑥날쑥하다. 지난해 각막이식 건수는 500건. 올해 3월까지 진행된 각막이식 건수는 80건에 불과하다. 찾는 사람은 많은데 여전히 기증은 가뭄 상태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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