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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여름 뜰

입력 | 2015-05-01 03:00:00


여름 뜰 ―김수영(1921∼1968)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오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이지러진 얼굴로
여름 뜰이여
너의 광대한 손을 본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나리는 여름 뜰을 보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인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있다
그것은 둔한 머리에 움직이지 않는 사념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크레인의 강철보다 더 강한 익어가는 황금빛을 꺾기 위하여
너의 뜰을 달려가는 조고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여름 뜰이여
나는 너에게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노라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 뜰을 흘겨보지 않을 것이다
여름 뜰을 밟아서도 아니 될 것이다
묵연히 묵연히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은 잘도 자연에 메시지를 담아낸다.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계절 여름, 그 뜰은 나무와 풀이 뿜어내는 생기로 진동한다. 그런데 시의 ‘여름 뜰’이 전하는 메시지는 부정적이다. ‘여름 뜰’에 그 구성원들이 왕성한 생명력을 자유로이 뻗치지 못하게 통제하는 어떤 ‘광대한 손’이 있는 것. ‘이렇게는 못 살아!’ 불끈하지만 시인이 무슨 힘이 있나, 이내 젖먹이처럼 무력감을 느낀다. 이 시가 쓰인 1956년에는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건 민주당 후보 신익희는 5월 5일 선거 유세차 호남으로 내려가던 기차에서 뇌일혈로 급서하고,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로 대응하던 자유당 후보 이승만은 큰 표 차로 당선됐다. 그럼에도 진보당 후보 조봉암의 30% 가까운 득표율에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간첩이 많은 듯하다” 했단다. ‘나의 표정’을 착잡하게 만든 데는 민주당과 진보당의 후보 단일화 실패와 그 결과가 크게 작용했을 테다. 환멸과 좌절감으로 말을 잃은 중에도 시인은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는 당시 온 국민에게 내면화된 공포의 소리이자 그 공포의 대상에게 시인이 꼭 돌려주고 싶은 소리이리라.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