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6〉선거 책사들(上)
1997년 12월 대선 개표 당시 MBC의 보도 화면. MBC는 투표가 끝난 18일 오후 6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김대중 후보 1위, 이회창 후보 2위, 오차범위는 ±1%포인트 내’라고 보도했다. 갤럽의 조사 결과는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실제 투표 결과는 김대중 40.3%, 이회창 38.7%였다. 갤럽의 박무익 회장은 “국민들에게 생생한 여론조사 쇼를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동아일보DB
1997년 대선 승리 이후 그는 ‘대통령 선거전략 보고서’란 책을 저술했다. 그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선거전략 수립에 참여하게 된 과정에는 데이비드 모레이라는 미국 선거전략가의 도움이 컸다.” 모레이는 필리핀에서 코라손 아키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책사다.
이영작은 모레이, 유종근(후에 전북지사 지냄), 정동채(후에 광주 출신 국회의원 지냄)와 팀을 만들어 선거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영작은 1992년 대선에서 실패한 후에도 모레이를 비롯하여 제리 캐시디, 스티브 코스텔로 같은 선거전략가들과 더불어 소위 ‘뉴DJ플랜’을 만든다고 분주했다.
미국 대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책사들 가운데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든 딕 모리스라든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든 칼 로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저마다의 장기를 갖고 대통령을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를테면 딕 모리스는 ‘확장’형이다. 그는 표만 있으면 모두 끌어들이는 전략을 택했다. 필요하면 철학도, 공약도 변형해 가면서 접근하는 그런 전략이다. 민주당 내에서조차 일관성이 없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치면서.
이에 반하여 칼 로브는 ‘표 다지기’형이다. 원래 공화당 지지층은 보수적이고 결집력이 크다. 바람만 불어도 가볍게 날아가는 그런 표가 아니다. 관건은 그런 고정적인 지지표들을 투표장에 끌고나오는 것이다. 특히 선거판을 결정하는 몇 개 주에서 표를 다지면 승산이 있다는 걸 칼 로브는 증명했다.
김대중은 지역적으로는 호남, 그리고 성향으로는 진보 개혁세력이란 두 종류의 확고한 지지층이 있었다. 이를 다지기 위해서는 칼 로브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집권하기는 어렵다. 호남이나 진보 성향의 표만 가지고 과반수를 얻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DJP에 더하여 DJT까지 아우르는 큰 그림이 있어야 했다. DJ의 기존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과감하게 충청과 영남의 온건 보수를 향하는 딕 모리스의 확장이 필요했다.
이런 두 가지 혼합형을 우리는 ‘뉴DJ플랜’이라 했다. 사실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이란 어떻게 이런 상반된 성향을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서 조화시키느냐, 또 이를 어떻게 때와 장소를 가려서 풀어 나가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자칫하면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놓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영작은 항상 전략 문제에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부딪혔다. 가장 심각한 대립이 이해찬과의 의견 충돌이었다. 이해찬의 전략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토착적이다. 그는 항상 사태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DJP가 성사되어도 마지막 표심이 김대중에게 온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 1987년과 1992년 두 번의 대선에서 그는 단단히 교훈을 얻은 것 같았다.
12월에 들어서면서 이해찬은 나에게 매일 여론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후보에게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갤럽에 여론조사를 맡겼다. 그리고 거의 매일 아침 갤럽의 최시중 회장을 만나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그 의미를 해석하였다. 최 회장은 매우 신중하였다. 1∼2%포인트 우위라고 하면서도 ‘이는 오차 범위 내’라고 여백을 두었다.
다음 날 김대중 후보에게 결과를 보고하면 김 후보는 다른 조사 결과를 내놓고 비교한다. 그 보고서에는 언제나 5∼6%포인트 앞서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김 후보는 짜증부터 낸다. “아니 이렇게 죽자고 뛰고 있는데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 말이오?” 아무리 노련한 김대중도 자기에게 유리한 말, 듣기 좋은 말이 솔깃한 것 같다. 나는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이 결과는 갤럽에서 나온 권위 있는 조사 결과입니다.” 그래도 김 후보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 조사도 권위가 있어요. 미국의 통계학 박사가 조사한 것이에요.”
허탈해서 사무실에 돌아오면 이해찬이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 병이 또 생겼군요. 지난 대선 때도 항상 그 자가 초를 쳐서 우리하고 다투었는데 또 그 병이 도졌군요. 우리는 우리대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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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숫자와 더불어 숨을 쉬는 사람입니다.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결과만 내놓지, 우리에게 조사 자료를 주지 않습니다. 준다고 해도 다 믿기는 어렵습니다. 2차, 3차 분석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여론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영작이 1996년 9월 DJ에게 보낸 ‘제15대 대선전략 기본계획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니, 그의 ‘기본계획서’에는 당시 한국 여론조사 기관들과 언론의 ‘경마식 여론조사(public polling)’에 대한 혐오와 질타가 쉼 없이 등장한다.
그는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 출신이었다. 그러나 미국 유학 이후 통계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메릴랜드대 통계학 교수를 지냈고, 1997년 대선 무렵엔 미국 국립보건원(NIH) 통계학 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나는 ‘숫자가 숨을 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정도로, 이영작은 통계의 매력에 빠져 살았다.
“너무 하지 마시라는 것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밖에서 남이 해놓은 여론조사는 믿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영작은 거듭 그렇게 주장했다. 거기엔 이론적인 이유 말고도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96년 4월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회의는 낙관론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이영작의 ‘국내 동료’이자 메릴랜드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고기석 박사가 “총선 전망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보내왔다. 이영작은 즉각 경고음을 울렸다. 그러나….
“당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선거에 왜 이영작은 쓸데없는 여론조사를 새로 하자고 하느냐?’고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전략적 결정에 거의 쓸모없는 ‘경마식 여론조사’에 매달린 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참패를 맛봐야 했다.”
이영작은 실망했다. 다시는 DJ를 위해 선거 전략을 세우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DJ는 그의 고모부였다. 아니 그 전에 그는, DJ만큼 ‘준비된 후보’는 없다고 확신했다.
“후보전략(candidate strategy)을 세울 때 여론조사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긴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의지했던 것은 김대중 후보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김 후보가 오랫동안 대통령이 되기 위해 준비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혹자는 그 같은 노력을 ‘대통령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처럼 숭고한 노력이 또 어디 있을까?”
닉슨 대통령이 재선 선거운동 때 사용한 ‘뉴 닉슨 전략’을 본떠 92년 ‘뉴DJ플랜’을 시도한 것도, 97년 ‘준비된 후보’를 후보전략으로 내세운 것도 이영작이었다.
하지만 선거 막판 실책을 하고 만다.
“자네는 18일 아침에 내가 6.7%포인트 차이로 이길 것이라고 했네. 그런데 결과는 불과 1.6%포인트 승리 아닌가. 무엇이 어떻게 된 건가?”
97년 대선 이틀 뒤인 12월 20일. DJ는 인사차 들른 이영작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말에 경상도 유권자들이 대거 몰려나오는 상황을 간과한 탓이었다.
김창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