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재·보궐선거가 여당의 낙승(樂勝)으로 마무리되면서 후임 국무총리 인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완구 전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불명예 퇴진하면서 서둘러 후임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청와대는 “일단 시간을 벌었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에서 계속되는 ‘총리 잔혹사’ 탓에 최적임자로 생각하고 있는 인사들이 간곡히 고사하는 경우가 많아 청와대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인사청문회 악몽’도 총리 제안을 선뜻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설득 능력을 갖춘 통합형 총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도덕성과 개혁 의지, 비전 제시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 통합형 총리… “홍보가 아닌 설득 능력 갖춰야” ▼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책임총리’라는 말은 법적 용어는 아니다. 김황식 전 총리는 2011년 경기 성남 가천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존재감이 없는 게 내가 목표하는 바”라면서 “국민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내가 일한 게 쌓여서 그게 국민에게 돌아가면 그게 더 좋다”는 말을 했다. 그는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들어서…”라는 말로 묘한 여운을 남겼다.
김 전 총리 “대통령과의 신뢰가 가장 중요”
그렇다면 김 전 총리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어땠을까. MB 정부 시절 한 장관급 인사는 “국무회의 같은 때 이 대통령이 ‘김 총리만큼만 하라’거나 오찬 만찬을 하면서 ‘총리가 잘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종종하곤 했다”며 “확실히 힘을 실어준 편”이라고 술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각의 장관들이 김 전 총리의 지시를 잘 이행하고 업무 협조도 원활했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결국 대통령과의 인간적인 신뢰와 소통이 중요하다”며 “대통령이 국정의 주요 현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것도 결국 신뢰의 깊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를 지낸 한덕수 전 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국정을 통할한다는 헌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매 건마다 대통령의 명을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 전 총리는 “국방과 외치 부문을 제외하고 국가의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총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면 대개 총리의 업무 영역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차기 총리의 덕목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홍보(campaign)가 아닌 설득(advocacy)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한 전 총리는 “과거에는 좋은 정책을 만드는 것이 80이라면 설득이 20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정반대가 됐다”며 “정부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을 상대로 진솔하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총리의 덕목”이라고 했다.
대통령 권한에 도전하는 듯한 태도는 금기
MB가 “자원외교 등 세계시장을 다니면서 할 일이 많은 총리는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독자적인 업무를 가지고 국내외에서 활동해야 한다”며 초대 총리로 지명한 한승수 전 총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에 따라 묵묵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책임총리다 뭐다 하면서 대통령에게 반대하고 거역해야 잘하는 총리가 아니라는 것. 한 전 총리는 직을 떠날 당시인 2009년 9월 기자들과 만나 “총리는 자기 정치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튀지 않는 행동 때문에 ‘용각산 총리’(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리기도 했다.
한 전 총리가 지목한 ‘거역하는 총리’는 이회창 전 총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YS) 정부 시절 ‘대쪽총리’로 불렸던 이 전 총리는 대북(對北) 관계와 관련해 정부 내에 설치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내용이 총리를 거치지 않고 보고되는 사례에 불만을 토로하는 등 YS와 갈등을 겪은 끝에 4개월 만에 사실상 ‘경질’됐다.
청와대 비서진은 이 전 총리가 YS의 중국, 일본 방문 당시 국방부와 일선 부대를 시찰하고 지휘관으로부터 정식보고를 받은 사실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낙마한 이완구 전 총리가 취임 직후 전직 대통령을 예방하고 전방에 가서 안보태세를 점검하는 모습을 보며 청와대와 친박(친박근혜) 핵심이 “안방 살림 잘 챙기라고 뽑아놨더니 ‘오버’한다”며 불편해했다는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독 총리는 NO… 강한 추진력 있어야”
뭐니 뭐니 해도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총리가 되는 만큼 도덕성을 강조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이어 ‘개혁 의지’와 ‘비전 제시 능력’을 꼽은 전문가도 적지 않았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상 유지 총리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며 “현 시점엔 부정부패 척결보다 중요한 문제인 공무원연금 개혁과 노사정 합의를 도울 총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올해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한 해라는 생각으로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축사만 읽는 총리는 의미가 없다”며 “대통령과 총리가 수시로 마음 편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국정 고민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인 출신 총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갈렸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정치인 출신이라고 해서 인사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할 것이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완구 전 총리를 보면 입증된다”며 인재 풀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아이러니하지만 정치인 출신 총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권 중반부의 주요 쟁점들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하려면 여야와 소통이 가능한 정무형 총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화합 총리는 정치 구호… 다양한 인재 풀 가동해야
인재 풀을 넓혀야 한다는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수첩’을 버려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최창렬 교수는 “야당에 인사추천권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제안을 내놨다. 이내영 교수는 “야당이 추천하게는 못하더라도, 인사 풀을 넓혀 적어도 ‘야당이 납득할 만한 사람을 찾으려 애썼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정부 여당의 태도는 안 바뀌면서 야당에 협조만 강요한다’는 불만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박명호 동국대 교수도 “거국 내각까지 가지 않더라도 국회의 초당적인 국정협조를 끌어낸다는 의미에서 여야 정치권에 총리 후보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추천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국정운영이 위기인 상황에서 내 편 네 편을 가릴 때가 아니다”라며 “나라부터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탕평인사’에 나서야 할 때”라고 했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화두에 올린 ‘호남총리’ 발언 등 지역 안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반응이 나왔다. 윤종빈 교수는 “일각에서 나오는 ‘동서화합형’ 총리는 정치적인 구호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윤 교수는 “여야가 내년 총선에서 상대 지역의 표를 의식해서 하는 말”이라며 “화합형 총리는 대통령 임기 후반에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스타일”이라고 덧붙였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성별, 나이, 지역으로 나눠버리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낡은 병폐”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김 전 의장은 “정치인 출신 총리가 실패했으니 학계나 시민사회에서 나와야 한다는 식으로 미리 ‘프레임’을 짜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대 총리 중에는 충남(대전 포함)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북과 평안남도 출신이 5명으로 뒤를 이었다.
‘계륵’ 같았던 우리의 총리
우리의 국무총리 제도는 의원내각제의 총리와 같은 행정부의 수반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첫째 기능이다.
“이(승만) 박사는 국무총리를 미국식 대통령제에서는 비서실장 정도의 자리라고 해서….”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윤치영 내무부 장관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무총리관(觀)’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총리가 결정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총리 무용론’은 이렇게 제헌 정부의 시작부터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전 총리는 내각을 구성하는 데에 거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내각 수립 당시) 한민당에서 천거해온 8명의 인사를 대통령에게 기회 있는 대로 귀띔해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 제의를 말없이 듣던 이 전 대통령은 ‘그 자리는 내가 벌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는데’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국무총리의 ‘탈(脫)정치화’를 바랐다. 그는 국무총리에게 정치자금 등의 문제는 관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특히 고위 군 장성과의 접촉은 물론이고 군부대 시찰도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군 문제를 금기시했다. 박정희 정권 당시 2인자였던 김종필(JP) 전 총리는 다소 예외적으로 국정 운영에 나섰다. 하지만 그도 결국 박 전 대통령의 견제 속에서 끊임없이 청와대와 갈등을 빚다가 경질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총리였던 최규하 전 총리는 10·26사태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총리에서 대통령이 된 유일무이한 경우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 선출은 간선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국무총리는 없는 셈이다. 최 전 총리는 ‘위기관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1979년 12·12사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등 격동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8개월 만에 하야했다.
▼ 용각산 총리… “자기 정치 하려는 사람은 안돼” ▼
“사고수습-국면전환용은 그만”
대형 사고 뒤엔 총리 교체… YS 5년간 6명 거쳐가
김종필-이회창 전 총리는 청와대와 갈등 빚다 물러나기도
대형 사고 뒤엔 총리 교체… YS 5년간 6명 거쳐가
김종필-이회창 전 총리는 청와대와 갈등 빚다 물러나기도
2013년 12월 3일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왼쪽)를 비롯한 역대 총리들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정 총리, 고건 노신영 현승종 정원식 이현재 이홍구 이한동 이수성 정운찬 김황식 한덕수 전 총리. 동아일보DB
사고 수습 및 국면 전환용 총리
‘총리 잔혹사’가 본격화된 것은 5공화국부터였다. 총리 10명을 보좌해온 이재원 건양대 교수는 저서 ‘대한민국 국무총리’에서 “전두환 정부가 국무총리 해임을 경제사회적 사건과 연관시켜 그 도의적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정형화해 오늘에 이르는 관례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노-노 체제’를 이룬 18대 노신영 총리는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무사히 치르고 대중관계 등 외교 분야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결국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뒤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노재봉 전 총리도 1991년 경찰의 ‘강경대 치사 사건’에 하는 수 없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뒤이어 집권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5년 동안 6명의 총리를 임명했다.
문민정부 첫 총리인 황인성 전 총리는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쌀 수입이 불가피해지자 12월 16일 국면 전환용으로 할 수 없이 사표를 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쌀 수입은 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언한 책임을 대신 떠안은 것.
후임 총리들의 운명도 비슷했다. 이영덕 전 총리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홍구 전 총리는 다음 해 일어난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경질됐다. 이수성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와 연이어 일어난 외환위기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너무 강했던’ 총리 이해찬
김대중 정부에서는 31대 김종필 전 총리가 DJP 연합으로 사실상 공동정부를 수립하며 정권 2인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책임총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전 총리였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던 전임 고건 총리가 ‘몽돌(대통령)과 받침대(총리)’라는 온건한 역할론을 펼친 반면, 이 전 총리는 “야구팀으로 말하면 대통령은 구단주, 총리는 감독”이라는 정반대 이론을 바탕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실 국장 출신인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회창 이해찬 전 총리 정도”라고 언급했다.
이해찬 전 총리의 권한은 노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에서 나왔다. 이 전 총리는 퇴임 후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거의 친구처럼 동지처럼 일해 왔다”며 “총리 시절 완전한 책임총리제를 실시해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고압적인 태도로 자주 논란의 중심에 섰으며 결국 ‘3·1절 골프 파문’으로 18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운찬 전 총리가 ‘세종시 총리’라는 브랜드를 구축하며 세종시 원안 수정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는 충청권 의원들에게 ‘매향노’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까지 수정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결국 2010년 6월 29일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돼 정책 어젠다를 잃은 뒤 사의를 표명했다.
하태원 triplets@donga.com·홍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