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복지 신음하는 일본]포퓰리즘이 망친 연금시스템
낮 시간 동안 노인을 돌보는 일본 도쿄의 한 노인요양시설에서 블랙잭 게임이 한창이다. 단순히 노인들의 여가 활용 시설이라고 하기엔 카지노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설이 좋다. 이용료의 90%는 정부가 부담한다. 노인 치매에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지만 노인 과잉 복지의 한 사례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28세의 이 남성은 국민연금 얘기가 나오자 손사래를 쳤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받을 가능성도 없는 돈을 낼 이유도, 여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젊을 때 낸 것을 나이 들어 돌려받는 연금 구조가 돌아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의 연금 납부율이다. 젊은이들이 연금 납부를 하지 않으면 연금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연금 납부를 기피하는 것은 내고 싶어도 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금을 내면 손해’라는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연금을 내도 나중에 돌려받는 돈은 부모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쥐꼬리만 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1961년 국민연금이 만들어지기 직전인 1960년만 해도 일본의 15∼64세 생산가능인구 대비 65세 이상 고령자 인구 비율이 8.9%에 불과했다. 약 11명의 청년 중년 세대가 1명의 고령자만 부양하면 됐으니 큰 부담이 아니었다. 거의 무상복지에 가까운 일본의 연금제도는 이런 계산에서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난해 15∼64세 생산가능인구 대비 고령자 비율은 39.6%나 된다. 현역 세대 2.5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해야 한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후생노동성 산하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전망치에 따르면 고령자 비율은 2022년 50.2%(현역 2명당 고령자 1명), 2040년 66.8%(현역 1.5명당 고령자 1명)로 급증한다.
예측이 틀리고 상황이 변했으면 그때그때 바꿨어야 했는데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앞으로 100년간은 끄떡없다”고 하지만 학계는 현재 추세라면 후생연금(근로자 연금)은 2038년에, 국민연금은 2040년에 고갈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노인 여가활동까지 세금 펑펑 “젊은층 외면한 실버 민주주의” ▼
日 재정 흔드는 ‘노인복지의 늪’
최근 방문한 일본 도쿄(東京) 아디치(足立) 구의 한 요양 시설. 노인복지시설 전문 기업이 운영하는 이곳은 낮 시간 동안 노인들을 돌보는 이른바 ‘데이 서비스(day service)’를 제공하는 곳이다. 현관문을 열자 4명의 노인이 둘러앉아 있는 마작 게임 테이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블랙잭 게임 테이블도 보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딜러가 노인들에게 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바로 옆 슬롯머신(빠찡꼬)에서는 한 할머니가 요란스럽게 구슬을 돌리고 있었다. 간판만 요양시설이지 내부는 카지노와 다를 바 없었다. 시설 관계자는 “두뇌 회전을 통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 가상 화폐로 게임이 이뤄지기 때문에 실제로 돈을 따거나 잃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블랙잭을 하던 70세 남성 노인은 “뇌경색으로 수술을 두 번 하면서 손가락이 마비됐는데 카드를 만지면서 좋아졌다”고 말했다.
일본의 복지는 세금 먹는 하마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민간 기업들이 정부 돈을 노리고 운영하는 거대한 산업이기도 하다. 낮 시간 동안 고령자를 차로 모셔와 식사와 입욕 등의 서비스를 당일치기로 제공하는 ‘데이 서비스’ 시설 수익률은 무려 10.6%에 이른다.
노인 복지시설 운영이 ‘짭짤한 비즈니스’라는 소문이 나면서 일본의 서점에는 ‘데이 서비스’ 창업 노하우 같은 책들이 즐비하다. 노인 한 명을 유치하면 그만큼 예산을 더 받을 수 있으니 곳곳에서 치열한 쟁탈전도 벌어지고 있다. 아로마세러피 서비스에서부터 네일(손톱) 미용까지 해주는 시설도 있다.
그만큼 복지 분야에서 ‘도덕적 해이’ 현상이 심각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후생노동성이 지난해 10월 전국 요양시설을 일제히 조사해 보니 과잉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거짓으로 정부 보조금을 신청한 사례가 전국 자치단체의 절반 이상(52%)에서 적발됐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일본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0년 4월 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40세 이상이 되면 국민의료보험과 별도로 소득에 따른 보험료를 낸 뒤 65세가 되었을 때 목욕, 옷 갈아입기, 식사, 용변 등의 수발을 받는 데 필요한 비용을 나라에서 지원받는 프로그램이다.
이 같은 요양보험이 등장하게 된 것은 국민의료보험이 파탄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입원하고 병원 침상을 점령하는 바람에 전체 국민의료보험 중 노인 의료비가 한때 31%까지 치솟을 정도로 재정위기에 봉착하자 아예 고령자 간병을 위한 별도의 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일본 재정을 위협하는 ‘새로운 폭탄’이 되고 있다. 요양보험이 처음 시작된 2000년 3조6000억 엔이던 지출액은 2014년 10조 엔으로 급증했다. 고령 인구가 늘어난 탓도 있지만 본인 부담이 10%밖에 안 되는 요양 서비스 이용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1947∼1949년 출생)가 모두 75세 이상이 되는 2025년 이후는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일본인 5명 중 1명이 75세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요양보험 지출액은 지금의 2배인 19조8000억 엔으로 불어난다는 게 후생노동성의 추산이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무상복지가 본격화되기 전인 1970년 일본의 사회보장 지급액 총액은 당시 국민소득(NI)의 5.8%인 3조5000억 엔이었다. 하지만 44년이 지난 지난해에는 115조2000억 엔으로 국민소득 대비 31.1%로 늘었다.
사회보장비 지출이 많다지만 혜택은 노인층에 집중된다. 지난해 전체 사회보장 지급액 중 60세 이상 노인들이 수령한 연금은 56조 엔으로 전체의 48.6%였다. 또 고령층에 혜택이 집중되는 국민의료비도 37조 엔으로 전체의 32.1%였다. 노인들을 위한 지출이 어림잡아 전체 사회보장비 지출의 80% 가까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과 육아를 위한 사회보장비 지출은 5조3000억 엔으로 전체의 4.6%에 불과했다.
이러한 일본의 현실은 표가 많은 노인층 수발에 미래 세대가 희생당하는 ‘실버 민주주의’의 전형이다. 한 노인요양시설에서 만난 70대 노인에게 “정부가 곧 노인 복지 축소안을 만들 것 같은데 노인들의 반발이 크지 않겠느냐”고 묻자 “아무리 정부가 시도해 본들 국회에 가면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