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복지 신음하는 일본]끈질긴 무상복지의 유혹
대표적인 대중영합주의에 따른 공약으로 재정 건전성만 악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약을 철회하거나 축소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먼저 무상보육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2012년 말 중의원 선거 때 이 공약을 내세워 표를 모았다. 무상보육 전면 실시에 필요한 예산은 최소 7000억 엔(약 6조5000억 원)에 이른다.
‘재정 건전성’을 감안한 결단으로 평가받았지만 일본 정부는 4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복지의 유혹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정기국회에 연소득 270만 엔 미만 가구의 유치원 보육료를 공·사립 가릴 것 없이 연 3만6000엔으로 경감해 주기로 하는 예산안을 제출한 것이다.
공립유치원의 연간 보육료는 연간 5만9000엔, 사립유치원은 10만8800엔이다. 저출산 극복을 위한 제도이지만 사립유치원에까지 획일적인 혜택을 주겠다는 발상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고교 무상교육은 민주당 정권 때인 2010년 전면 도입됐다. 연 11만8800엔인 수업료를 면제해 주려면 정부가 해마다 약 3950억 엔씩의 재정부담을 져야 한다.
대중영합주의 비판이 높아지자 자민당과 공명당 등 연립여당은 2014년도 신입생부터 연소득 910만 엔 이상 가구에 대해서는 고교 수업료를 유료화하는 개정 법안을 2013년 통과시켰다. 법안 개정으로 무상교육 대상 고교생은 360만 명에서 281만 명으로 약 22% 감소했다.
▼ “워킹푸어보다 노숙자가 낫다”… 생보자 17% 근로가능 연령대 ▼
도덕적 해이 부른 日 사회보장제도
생활보호대상자인 노숙 노인을 수용한 오사카의 한 복지맨션. 복지사업에 대한 감시가 소홀하다 보니 일부 복지맨션 업자들이 수용자들에게 싼값에 숙식을 제공하면서 필요 이상의 요양보험과 의료보험을 쓰게 하고 악덕 의사로부터 뒷돈을 받는 영업을 해 재정 파탄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오사카=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과거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슬을 피하던 간이합숙소를 개조한 맨션 앞에는 ‘무일푼이라도 당일부터 생활 가능, 복지를 받고 싶은 사람 상담’ 등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지역 시민단체인 ‘가마가사키 지원기구’ 마쓰모토 히로후미(松本裕文) 사무국장은 “2009년부터 노숙자의 절반이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는데 이때 생긴 시설들”이라고 말했다.
이후 전국에서 신청이 급증했다. 문제는 나랏돈을 노리고 돈이 되겠다 싶은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만들어 뛰어들면서 비롯됐다. 주로 대형 숙박시설을 소유한 업자들이 노숙자들이 받을 생활보호비에 눈독을 들여 노숙자 시설을 만들겠다고 집단 신청하는 방식이었다.
오사카 부 경우만 해도 혼자 사는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생활보호비로 월 7만9530엔(약 73만 원)이 지급된다. 여기에 주택임차료 보조금(월 4만2000엔)이 더해지면 총액은 약 12만 엔(약 112만 원)으로 올라간다. 업자들은 이들을 집단 수용한 뒤 임차료, 식비, 보호비 명목으로 노숙자들에게서 돈을 받아낸다.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요양보험과 의료보험도 악덕업자들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요양시설이나 의사들과 연계해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요양서비스를 받게 하면서 뒷돈을 받는 식이다. 생활보호대상자 역시 무료 혜택 대상이 되면서 주저 없이 요양 서비스를 누렸다. 돈이 되자 야쿠자 조직까지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말이 무성했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빈곤 문제 권위자 후몬 다이스케(普門大輔) 변호사는 “단속이 심해지면서 최근에는 노숙자 대신 고령자가 타깃이 되고 있다”며 “병원에서 퇴원해도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복지맨션이 집중 유치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뒷돈이 오간다”고 전했다.
2008년 2조5000억 엔이던 일본의 연간 생활보호비 지출은 최근 4조 엔 가까운 규모로 불어났다. 이 가운데 의료비 지출이 전체의 절반이다. 꾀병으로 병원에서 신경안정제 등 약품을 타낸 뒤 인터넷에서 싼값에 판매하다 적발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병원이 공범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사회보장 전문가는 “환자가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은 약을 처방하는 병원도 있다”며 “병원의 과잉 진료, 과잉 검사, 과잉 투약에 복지 재원이 줄줄 새고 있다”고 지적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해 성실하게 연금 보험료를 납부한 사람들이 은퇴 이후에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가마가사키의 한 복지맨션 관계자는 “연금 생활자는 무상 의료나 무상 요양 혜택이 없기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보다 연금 생활자의 월세를 오히려 깎아주고 있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비가 최저임금보다 높아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지자체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는 게 ‘워킹 푸어(working poor·근로빈곤층)’보다 낫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근로빈곤층의 월평균 수입은 17만 엔으로 생활보호대상자가 정부에서 받는 돈(10만∼15만 엔)보다 많다. 하지만 근로빈곤층은 주택 임차료와 세금, 사회보험료 등을 자신이 해결해야 해 이 금액을 빼고 나면 생활보호대상자의 생계비보다 오히려 적어진다.
심지어 생활보호대상자의 주택 임차 보조금은 저소득층(연간 가구수입 300만 엔 미만)의 평균 주택 임차료보다 20%가량 높다는 게 재무성의 조사 결과다.
생활보호대상자는 여기에 NHK 수신료, 주민세,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를 면제받는다. 철도 운임도 할인된다. 현역 세대(65세 미만 일할 수 있는 세대)에서 생활보호대상자가 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해 10월 일본 생활보호대상자 161만여 가구 중 현역 세대 가구주는 28만 가구로 조사됐다. 전체의 17%로 10여 년 전인 2003년의 9%(8만4941가구)에 비해 배로 늘어난 것이다.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로 이어진 ‘천사의 역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도쿄·오사카=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