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한국 외교/新 실용의 길]<中>남북관계부터 풀어야 “남북관계를 외교무기로”
지난달 28일 경기 파주시 남북출입국관리소를 통해 2010년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치 이후 처음으로 민간단체의 대북 비료 지원 차량이 북한을 향하고 있다. 교류협력을 바탕으로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하는 균형을 갖춘 대북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파주=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지난해 8월 4일. 원동연 북한 통일전선부(대남부서) 부부장은 금강산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남측이 대화를 제의하면 우리(북한)가 받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를 전해들은 통일부는 8월 18일부터 시작되는 한미 군사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직전인 13, 14일경 남북 고위급 접촉을 북한에 제안하자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하지만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는 회담 날짜를 8월 19일로 결정했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19일로 하되 북한이 원하면 날짜를 조정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정부는 결국 11일 “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을 19일 개최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17일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은 개성에서 만난 남측 인사들에게 “하필 군사훈련 기간에 고위급 접촉을 하자고 제안하느냐”고 말했다. 결국 2차 고위급 접촉은 무산됐다.
○ 대북 실리주의 부재가 외교 난맥으로
북핵 문제와 대북정책에서 북한을 설득할 실질적 해법을 만들 실용주의의 부재는 남북관계 주도력 상실은 물론이고 불안한 긴장관계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관성 있는 외교 전략 부재와 함께 한미 한중 한일 한-러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남북관계가 정체되자 한국의 ‘중국 북핵 해결 활용 전략’은 중국에 의존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전직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는 5일 “한중이 밀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품이다. 중국은 덕담은 해도 발 벗고 북한 문제 해결에 나서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국이 중국에 의존하자 중국은 한국에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지난해 7월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역사 문제에서 대일 한중 공동대응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밀착된 듯한 한중관계는 미국의 우려만 증폭시켰다. 한미관계에 정통한 전문가는 “미국은 자신과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과는 거리를 두고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중국과는 대일본 프런트 라인(최전선)에 선 한국을 보며 중국 활용이 아니라 아예 중국 쪽으로 가버리는 건 아닌지 우려한다”고 말했다.
○ 수동에서 선제적 대응 체질로 바꿔야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실용적 접근법으로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북정책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전직 외교안보 당국자는 “북한의 제의나 도발에 반응하는 수동적 리액티브(reactive)에서 벗어나 상황을 선제적으로 주도하는 프로액티브(proactive)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는 3월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들어선 뒤 대북 민간교류 대폭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북 교류 협력을 주도적으로 이끌겠다는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교류 협력만으로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건 아니다. 교류 협력은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군사적 도발 행위 앞에선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가는 모래성과 같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남북 간 정치·군사적 신뢰 구축과 교류 협력의 균형이 출발점”이라며 “두 문제를 병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남북이 눈높이를 맞춰 접점을 찾아야 한다. 정부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는 뜻을 전할 특사를 보내라는 의견도 나온다. 국가 원로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북한에만 먼저 신뢰를 보이라는 식은 안 된다”며 “박 대통령이 김정은 제1비서에게 △흡수통일 의사가 없다 △통일은 남북 모두에 대박이다 △먼저 신뢰할 테니 북한도 신뢰를 보여 달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윤완준 zeitung@donga.com·조숭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