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베니스 비엔날레’ 9일 개막
본전시관 초입부터 장검-총기… 심미적 디테일보다 문제의식 주목
韓작가 3명 6년만에 본전시 진출… 김아영 퍼포먼스 등 관람객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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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시관인 아르세날레 복판에 놓인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의 1965년작 ‘Cannone Semovente(이동형 대포)’(위 사진). 예술을 수단으로 사회 현상에 대해 투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 하는 올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향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른쪽은 본전시에 참여한 한국 작가 김아영 씨의 사운드퍼포먼스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3’ 공연 장면. 베네치아=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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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시인 국제전에 초청받은 53개국 작가 136명과 국가관 전시에 참여한 89개 나라의 커미셔너,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주제에 호응했다. 전쟁, 기아, 거대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개인 소외, 비대해진 자본주의가 야기한 정신적 혼란 등으로 소재는 갈리지만 뉘앙스는 대개 심각하고 엄숙하다. 각 국가관이 들어선 자르디니 공원 중심부에 군림하듯 걸터앉은 이탈리아관 전면부. 작가 오스카르 무리요와 글렌 리건이 줄줄이 늘어뜨린 큼지막한 검은 깃발 다발이 심상찮은 전운(戰雲)을 전한다.
본전시관인 아르세날레 초입에는 무기부터 쌓여 있다. 알제리 출신 작가 아델 압데세메드는 폭이 넓은 스페인 장검을 전시실 바닥에 꽃꽂이하듯 뭉쳐 듬성듬성 여러 군데 박아놓았다. 벽면에 설치한 미국 작가 브루스 나우먼의 네온이 마침 ‘죽음(death)’ ‘욕망(desire)’ ‘증오(hate)’ 등의 단어를 보여주고 있어 호응을 이룬다. 연결된 방에 총기류, 총탄껍데기, 사슬톱이 늘어서더니 홀 끝에는 1965년 제작된 대포 조각상을 가져다놨다.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김선정 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예술감독은 “주제의 무게감에 더해 물리적 전시 공간 활용에 여백이 부족해 피로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미래를 주제로 내세워놓고 현재의 문제에만 집착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미국 미술전문지 아트뉴스의 앤드루 러세스 편집장은 “자본과 귀족주의가 지배하는 현재 미술계를 크게 흔들지도 못한 채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보다 더 따분해 보이도록 나열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국가관은 아예 주제 흐름을 무시한 채 독자 노선을 가는 모습도 보였다. 공간을 최대한 비운 채 극소수의 조각 또는 회화만 전시하고 각각 ‘모국어’와 ‘신격화’를 주제로 내건 덴마크와 체코슬로바키아 전시관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심미적 디테일보다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주목받는 분위기에서 6년 만에 본전시에 진출한 한국인 작가 3인에 대한 기대는 한층 높아졌다. 프리뷰 첫날 두 차례 선보인 김아영 씨(36)의 퍼포먼스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김 씨는 국제유가 추이 데이터를 모티브 삼아 글을 쓴 뒤 이를 다시 음악으로 치환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3’을 7인 구성 아마추어 혼성 중창단에 맡겨 15분간 연주했다. 한국 노동 현장의 문제를 95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퍼포먼스로 풀어낸 임흥순 씨(46)의 ‘위로공단’은 4년간 65명의 여성 노동자를 인터뷰해 이야기를 엮은 작품이다. 남화연 씨(36)의 ‘욕망의 식물학’은 글로벌 시장 투기의 시초인 16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상작품이다.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를 맡은 이숙경 커미셔너, 문경원 전준호 작가(왼쪽부터)는 “은연 중에 국가관 작가들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 폐쇄적인 경쟁적 분위기를 초월하자는 제안의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고 말했다. 베네치아=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20주년 맞은 한국관
46세 동갑내기 문경원-전준호 합작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가 열리는 자르디니 공원. 완만한 경사로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보는 언덕을 가장 높이 오른 곳에 한국관이 있다. 이곳을 뼈대 삼아 한국의 예술을 드러낼 임무를 부여받은 전시 커미셔너와 작가에게 이 공간은 ‘자랑스러운 골칫덩어리’다.
올해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은 이숙경 영국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46)는 “20년 전 이 공원에 마지막으로 한국이 국가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돌이켜볼수록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했다. 이번 비엔날레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에 초빙된 이용우 국제비엔날레협회장은 “전시관으로서 건물의 활용도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그건 투명 유리를 써서 층고와 공간 프로그램의 제약을 끌어안고 지어야 했던 당시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통유리 외벽을 곡면 발광다이오드(LED) 디스플레이로 바꿔 건물 외부로부터 작품과 직면하며 접근하도록 한 것이 여타 국가관과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별점이다. 건물 바깥에서 2개, 내부에서 5개의 영상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가까운 미래 지구가 바닷물 속에 가라앉은 상황에서 한국관 건물만이 부표(浮標)처럼 둥둥 떠도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 속에서 혼자 생활하는 주인공의 하루 일과를 촬영해 7개 영상으로 선보였다. 주연은 배우 임수정 씨가 맡아 2월 경기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제작했다.
6일 오후 한국관을 둘러보고 나온 영국인 관람객 조지 웸부시 씨는 “국가관 전시가 대개 조용한 분위기인데 경쾌한 느낌이 전해져 좋다. 영상에서 여자 주인공이 발견하는 파란 구형 물체는 인류가 잃어버린 ‘심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래’라는 비엔날레 주제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디렉터는 “한국관 설립에 주도적인 공을 세운 고 백남준 선생이 보면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준호 씨는 “사실 디스플레이 숫자나 스피커 등 하드웨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해석은 보는 이의 자유겠지만, 인내심을 갖고 영상을 지켜봐준 이들이 ‘우리의 미래가 곧 우리의 현재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베네치아=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