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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천광암]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

입력 | 2015-05-08 03:00:00


천광암 산업부장

대학병원에서 정교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를 그린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의 일본 원작을 보면, 출세욕에 가득 찬 주인공인 조교수가 고가의 그림을 실세 정교수에게 선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림을 돌려보낼지 받을지를 놓고 정교수 부부간에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공짜이니 그냥 받자”는 부인에게 정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는 법이야.”

공짜가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역설적인 이치는 신문 사회면을 조금만 들춰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농촌지역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침구나 건강용품을 실제 가격보다 수십 배 비싼 값에 떠안기는 사기 상술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내거는 미끼가 바로 공짜다. 무료공연이나 공짜선물로 유인한 뒤 인정(人情)에 호소해서 안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수법이다.

공짜의 무서움을 몰랐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노인들뿐만이 아니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의 뒤늦은 후회는 더 뼈에 사무칠 것이다. 공돈의 올무에 걸려 수십 년간 공을 들여 얻은 권력과 명예를 하루아침에 내놓으려면 얼마나 속이 쓰릴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의 요즘 행태를 보면, 수령자로서뿐만 아니라 공여자로서도 공짜의 달콤함에 푹 절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책에 공짜라는 달콤한 포장을 씌워 국민들을 현혹하는 ‘정치상술(商術)’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정치인들이 우리 정치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싶다. 무상급식과 무상의료 등 무상복지 시리즈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려 한 여야의 짬짜미도 공짜 선호 심리를 파고드는 전형적인 정치상술이다. 소득대체율 상승으로 이득을 보는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표를 줄 것이라는 계산에 취해, 나라 곳간이나 미래세대의 부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의 지금 모습이다.

소득대체율을 올리지 않고 현 수준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의 파산은 예정돼 있는 상태다. 2014년 말 현재 470조 원 규모인 국민연금기금은 2043년에 2561조 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2060년에는 완전히 바닥나게 된다. 이후에도 연금을 계속 지급하려면 가입자들에게 보험료를 더 내게 하거나 혈세를 투입해야 하지만 급속히 고령화하는 인구구조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부채 때문에, 때를 놓치면 어느 하나도 쉽지 않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지금은 15∼64세의 청장년 100명이 노인 16명을 부양해야 하지만, 2060년에는 청장년 100명이 노인 80명을 부양해야 한다. 현재 3%대 후반인 잠재성장률은 고정적인 0%대에 진입하고, 지금 500조 원대인 국가채무는 무려 1경4612조 원으로 ‘조’를 넘어 ‘경’의 시대에 들어서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과잉복지 때문에 2033년경 한국 정부가 파산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실정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연금에 더 퍼줄 궁리를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연금재정을 건전화하고 나라 곳간을 채우는 데 모든 지혜를 짜내도 부족할 때다.

현 세대가 공짜를 앞세운 정치상술에 계속 놀아날 경우, 후손들은 빈껍데기 연금과 파탄 난 재정, 제로성장이 체질화된 허약한 경제를 유산으로 받게 된다. “공짜에 취해 나라를 거덜 내먹은 세대”라는 역사적 평가를 면하려면, 얄팍한 정치상술에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표와 여론으로 정치인들에게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