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의 한 장면.
많은 이가 열애 사실 인정으로 유해진의 가치는 올라가고 김혜수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다. 유해진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떤 내면과 기술을 가진 자이기에 최고 여배우의 낙점을 받았을까’란 궁금증이 증폭되겠지만, 김혜수에 대해선 ‘키도 훤칠하고 잘생기고 재벌 친척뻘이면서 왁스로 앞머리 얍삽하게 세우고 다니는 외국계 회사의 스타 비즈니스맨과 연애할 것 같은 미녀 스타’라는, 그녀에 대해 대중이 품어 온 판타지가 깨짐으로써 스타성이 실추되리라 내다본 것이다.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김혜수와 유해진은 시쳇말로 둘 다 ‘남는 장사’를 하는 결과로 귀결됐다. 특히 김혜수에 대해서는 돈이나 외모보다는 남자의 정신세계와 영혼과 취향을 중시하는 남다른 예술가라는 평가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그때부터 김혜수가 ‘여배우가 아닌 배우’이며 ‘배우가 아닌 예술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김혜수는 김혜수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물론 김혜수도 내가 자신의 스타일은 영 아닐 것이다), 김혜수는 그 어떤 여배우도 떠오르게 만들지 않는 오로지 그 스스로 존재하는 배우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김혜수가 보스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를 낮고 거칠게 변조하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타짜’)에나 어울릴 법한 맑고 은방울처럼 딸랑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보스에는 영 맞지 않을 법도 하지만, 그녀는 두목인 척하기보단 자신의 내면을 두목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가 막힌 몰입을 통해 목소리의 단점을 극복해 나간다. 영화 속 그녀는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비극적, 신화적, 원형적인 인물로만 느껴진다. 그녀의 모든 대사는 비현실적이지만 예외 없이 시적이고 절실하다.
‘차이나타운’을 본 세상의 엄마들은 깜짝 놀란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2011) 이후 최고의 모성애 영화로 나는 평가한다. 결혼을 한 적도 없고, 더더군다나 아이를 낳아 본 적도 없는 김혜수가 어쩌면 이렇게 엄마들이 공감할 만한 놀라운 모성을 야수들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장면의 한가운데서 그리도 역설적이고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내 몸이 자식에게 잡아먹혀 살점이 뜯기는 순간 오히려 내 자식이 험한 이 세상에서 비로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존재가 되었음에 기뻐하는,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 비릿한 모성을 김혜수는 어찌도 이리 잘 표현한단 말인가 말이다. 그녀가 죽어 가면서 딸 같은 부하(김고은)에게 남기는 마지막 대사 “죽지 마. 죽을 때까지. 이제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는, 그래서 죽어 가는 모든 엄마가 자식에게 남기고픈 말인 것이다.
김혜수는 섹슈얼리티를 버리고 모성을 택했다. 그녀에게는 많은 예쁜 여배우들처럼 영화로 떠서 CF 실컷 ‘따먹는’ 것보단 자신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비전을 추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 보이는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거의 열배 가까운 관객을 국내에서 쓸어 모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의 슈퍼 영웅들은 늘 개떼같이 몰려다님으로써 간신히 지구를 구했지만, 김혜수는 혈혈단신으로 여배우 기근에 빠진 한국영화를 구했다. 정말 김혜수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