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사본의 사진을 찍어 보낼 때 스마트폰도 되나. 아니면 디지털카메라를 써야 하나.’
요즘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 은행과 직원들은 다음 주 비(非)대면 본인 확인 허용방안 발표를 앞두고 금융회사들로부터 이런 종류의 줄기찬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생각지도 못한 문의가 너무 많아 아예 수십 쪽 분량의 가이드라인 책자를 만들어 금융사에 배포하기로 했다”며 “정부가 큰맘 먹고 규제를 풀려고 하는데 금융회사들은 당국이 그어 놓은 테두리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 당국을 여전히 ‘심판’이 아닌 ‘코치’로 생각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3월 취임 이래 금융사의 자율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금융당국은 선수들을 일일이 지시하는 ‘코치’가 아닌, 경기를 관리하는 ‘심판’의 역할을 하겠다”고 천명해왔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금융회사들이 당국의 촘촘한 지도와 감독을 원하는 역설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카드사의 부수 영업 네거티브 전환 방안’과 관련해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금융위는 정부가 정하는 몇몇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분야에 카드회사의 신사업 진출을 허용하기 위해 이 방안을 마련했다. 카드사의 수익성 제고와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당국은 기대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카드사는 “어느 신사업에 진출하면 좋은지 예를 들어 달라”고 당국에 ‘유권 해석’을 요청했다. 사실상 ‘포지티브 규제’로의 환원을 요구한 셈이다.
○ 당국에만 의존,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져
규제 완화를 기피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현상은 한국 금융산업의 고질적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국은 지금까지 금융업을 강도 높게 규제하면서도 인허가권을 통해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을 통제하며 기존 금융회사들의 과점(寡占)적 이익을 보장해왔다. 그 덕에 국내 금융사들은 치열한 경쟁 없이 비교적 손쉬운 장사를 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가 규제를 풀려 해도 온실 속에서 보호를 받아온 금융회사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대출규제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부동산 대출규제를 없애고 금융사들의 자율에 맡기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은행들의 여신심사 능력이 낙후된 탓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반면 금융업의 경쟁력이 높은 선진국에서는 민간이 스스로 강도 높은 규율을 정하는 자율규제 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금융시장 성숙도’ 순위에서 한국은 144개국 중 80위에 그쳤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민간에서 뭔가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정부가 항상 법적 근거를 살펴보는 게 우리의 규제 문화”라며 “수십 년간 체질로 굳어져 있어 이를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