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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교수의 영원을 꿈꾼 천년왕국 신라]日서 돌려받은 신라 유물들

입력 | 2015-05-18 03:00:00

30여년간 일본서 타향살이… 사연많은 노서리 고분 보물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금목걸이(왼쪽 사진)와 금팔찌. 이들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우리나라에 반환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 한일 고위 당국자들이 모였다. 메인테이블 오른쪽에 이동원 외교장관과 김동조 주일대사가, 왼편에는 시나(椎名) 외상과 다카스기(高杉) 수석이 앉아 25개에 달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수년을 끈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조인식 직후 이 장관은 “이만하면 만족”이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날 행사는 우리 문화재를 불법으로 반출한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계기가 됐다.

한일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근거해 이듬해 5월 28일 1차로 우리나라는 고고자료 339점을 비롯해 도자기 및 석조유물 100점, 도서, 마이크로필름 등을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우리 측은 반환 문화재라고 주장했지만, 공식적으로는 한일협정 비준을 기념해 일본 정부가 한국의 문화연구를 위해 유물을 증여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반환받은 문화재 중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것도 포함됐는데,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이 유물은 다른 어떤 신라 유물보다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때는 1933년 4월 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북 경주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이 자신의 집 토담을 따라가며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파다 곡옥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더 파내려가자 상당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는 4월 5일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반지 1점, 은반지 1점, 금 구슬 33알 등을 경주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총독부 박물관 소속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를 현지로 파견해 유물을 조사하도록 했다. 경찰서에서 유물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리미쓰는 한 쌍이어야 할 귀고리가 단 1점만 있는 데 의문을 품고 발굴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조사는 4월 12일 시작해 같은 달 19일까지 신속하게 이뤄졌으며, 금귀고리의 나머지 1점과 금 구슬, 곡옥 등 나머지 유물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노서리 215번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제야 본래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김덕언이 신고한 유물은 경찰서를 거쳐 총독부 박물관으로 넘겨져 국고에 귀속됐지만, 아리미쓰가 발굴한 유물은 여기서 빠졌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1934년 9월 조선고적연구회 이사장이자 조선총독부 2인자였던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가 이 유물을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하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절반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한일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오구라 컬렉션 등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극히 일부만이 1966, 67년 2차에 걸쳐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노서리 215번지 출토 유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금팔찌를 보물 454호, 금귀고리를 보물 455호, 금목걸이를 보물 456호로 각각 지정했다. 금귀고리와 금목걸이는 우리 측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유물과 합쳐졌다.

그런데 이후 행정적인 실수로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는 보물 지위를 잃고 황오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이 유물들은 신라 문화유산 관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 자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