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준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오늘의 세계에서도 지도를 보면 국가 간의 갈등 양상을 곧 알 수 있다고 로버트 캐플런은 ‘지리의 복수’에서 지적하며 지리는 국가가 당면한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국제관계학자들도 최근에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군사 개입한 것과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유권을 주장한 것 등을 보고 ‘지정학의 복귀’를 논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중일 및 러일전쟁과 미소냉전의 전투장이었던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한국 외교의 지상과제이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안보 당국이 현재 미중 간의 패권경쟁에 다소 안이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면 문제라 하겠다. 미국과 중국이 각기 한국을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 한다면 이는 축복이라기보다 우리가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를 상대국에 대한 정책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하나로 미일동맹을 지역 및 지구적 동맹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일본 ‘편들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중국은 더욱더 한반도를 대미정책의 하나로 취급해 주한 미군을 반대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한다면서 여전히 북한의 안정을 더욱 중시해 물질적 지원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열되는 다툼의 중간에 놓인 한국의 최선책은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에서 떼어내 우리의 최대 위협인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에 선제적으로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가 미중 간에 균형자, 등거리외교, 전략적 모호성을 추구해 소기의 성과를 내는 데는 국력의 한계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과거사에 대해 중국과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는 인상은 시정돼야 한다. 우리에게 한미동맹의 주목적은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6·25전쟁 이후 한미동맹은 전면전을 억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북한의 핵무장과 국지도발을 억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위협이 증대하고 있으니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꼭 필요하다면 조용히 배치해야 한다. 우리의 핵심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도 과감하게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함정’에서 벗어나 과거사에 대한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시급한 현안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실용주의 외교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사와 안보 현안 문제를 분리하기로 한 결정은 다행한 일이다. 일찍이 덩샤오핑은 1990년대에 과거사 문제는 후세대에 미루고 일본과 공동이익을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키신저도 그의 걸작 ‘세계질서’에서 역사의 의미는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조지 케넌에 의하면 외교관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부품을 교체하는 정비사보다 변화하는 토양과 기후에 알맞게 정성을 다해 꽃을 가꾸는 정원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우리 외교도 지정학의 거센 풍랑을 헤쳐 나가기 위해 더욱더 유연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안병준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