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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주제는 ‘문화예절’]<92>스피커로 막무가내… 시민 불편
연등회와 함께 불교 전통문화 행사가 열리던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외국인은 물론 가족 단위 관광객, 불교 신자 등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때 갑자기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남성이 목에 건 휴대용 스피커에서 특정 종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방송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언어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친구들과 함께 축제를 찾은 이강수 씨(48)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불교 행사가 열리는 이 거리에서 크게 틀어 놓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가득 찬 도심 거리마다 자신의 종교 교리를 설파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서울 명동, 서울역 광장 등에서는 거의 매일 비슷한 행사가 반복되고 있다. 심지어 등산로에서조차 산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종교 음악이 스피커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대부분 “종교를 권하는 건 자유이기 때문에 인정한다”면서도 “공공장소에서 전화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하고 있다. 관광하러 한국을 찾았다가 과도한 선교 소음에 시달렸다는 미국인 빌 브루너 씨(27)는 “서울은 소음 지옥 같다”고 비꼬았다. 외국인들은 한국을 다녀간 뒤 지하철과 거리에서 시끄럽게 전도하는 풍경을 ‘서울의 이상한 모습 중 하나’라고 인터넷에 소개하기도 한다.
다른 종교를 비하하고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종교인의 모습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최소한의 상식은커녕 비방과 협박을 주 내용으로 한다면 종교라기보단 사이비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종교인의 길거리 전도 활동은 문화 행사로 분류돼 법적 보호를 받는다. 미리 신고할 필요도 없다. 자유를 보장하는 만큼 질서 있게 진행하는 건 종교인의 책임이지만 도를 넘는 소음 때문에 시민이나 상인들은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관공서, 경찰서에는 종교인이 부르는 노래나 방송과 관련된 민원이 끊임없이 접수된다. 한 경찰관은 “민원이 들어오면 소음 측정도 하고 제재도 해야 하지만, ‘종교 탄압’이라고 반발할 수 있어 사실상 단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정진홍 이사장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결과”라며 “성숙한 시민의식이 곧 종교인의 덕목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