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행복원정대/엄마에게 날개를]<10>나는 엄마家長 입니다
“여보, 아무래도 나 그만둬야겠어, 회사….”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꽤 오랫동안 어려웠다. 회사 형편이 다시 좋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오래 못 다닐 거라면 퇴직금 한 푼이라도 더 챙겨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와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맞벌이니 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래, 고생했어. 한두 달 쉬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자.”
처음 한 달 동안은 가족 모두가 즐거웠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남편은 매일 아침 남매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교가 끝난 뒤 아이들이 돌아오면 간식 및 학원 스케줄과 숙제를 챙겼다. 아이들은 아빠가 챙겨주는 간식을 신기해하며 잘 먹었고, 신경질적인 엄마보다는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아빠와 공부하는 걸 더 좋아했다. 직장에 다닐 땐 집안일엔 손도 대지 않던 남편은 청소도 하고 세탁기도 돌렸다.
하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자 집 안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구직용 웹사이트를 뒤적이고 대학 동창이나 선배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괜찮은 일자리의 면접 기회를 갖기는 어려웠다. 이것저것 자격증 수험서를 사들고 들어와도 끝을 보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자영업 쪽으로 알아보라”고 하면 “치킨집 열었다 열에 아홉은 망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실직 기간이 길어지자 남편은 의욕을 잃어갔다. 요즘은 바깥 약속도 없고, 내가 출근해 일하는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눈치다. 나는 남편이 놀아 고민이라는 얘기를 털어놓을 친구가 몇 있는데, 남편은 실직 후 인간관계도 끊긴 듯하다. 이제는 집안일도, 아이들 돌보는 일도 안 한다. 얼마 전부턴 컴퓨터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날이면 늦잠을 자느라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도 빼먹는다.
남편은 무료해 죽을 지경인데 나는 바빠 죽겠다. 맞벌이 시절 가사도우미가 하던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새로운 일터에 출근한 것 같다. 저녁상 차리고, 먹고,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아이들 숙제 봐주는 것도 다시 내 일이 됐다. 지친 몸으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면 속에서 열이 확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참는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겁이 난다.
내가 가장 무서운 건 남편이 무너지는 거다. 가족 외식 후 번번이 내가 계산할 때, 명절에 거래처에서 내 앞으로 선물이 들어올 때 남편이 기죽지 않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아이들도 아빠 눈치를 본다. 어릴 적엔 “아빠랑 결혼할거야”라고 하던 딸이 요즘은 “난 결혼 안 해”라고 한다. 아빠는 집에서 노는데 엄마 혼자 회사일하랴 집안일하랴 힘든 모습을 보니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거다. 애 아빠가 노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이유를 건너 건너 듣고는 억장이 무너졌다. 성인 남자가 반바지 입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무서워서 딸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얘기였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미국에선 남편보다 수입이 많은 전문직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은 집안 살림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직장이 없으면 전업주부지만 남자는 그냥 백수다. 내가 그 여자들만큼 똑똑하지도, 많이 벌지도 못해서일까. 일 없이 놀면서 집안일도 하지 않는 남편이 밉지만, 남편이 나 대신 진짜 전업주부가 되는 건 더 싫다. 둘 중 하나가 직장을 관둬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잘리는 게 낫겠다 싶다. 나이 마흔 둘에 일없이 집에서 노는 남편, 정말 봐주기 힘들다.
■엄마 家長으로 살아보니
“남편은 학습지로 아이들 가르치고 집안일도 아이들과 함께해요. 직업은 없지만 성실하게 사니 큰 문제는 없어요. 제가 벌면 되죠 뭐.” (계약직 회사원 전모 씨·40)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