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서봉수 인터뷰
서봉수 9단(가운데)은 “어리거나 나이가 많거나 누구에게든 모르는 것은 물어본다”고 말한다. 요즘 한국기원 4층 국가대표훈련실에 자주 나온다. 왼쪽은 KBS바둑왕 이동훈 4단, 오른쪽은 지난해 연말 제대한 백홍석 9단. 한국기원 제공
―왕중왕전이 조 9단과 370번째 대국이었다. 패배한 뒤 국가대표 훈련실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
“그날 바둑은 유리했는데 초읽기에 몰리면서 실수를 했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젊었을 때는 지면 무척 아프고 오래갔다. 큰 승부가 있을 때는 밥도 못 먹었다. 승부욕이 강했던 때였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순간은 기분 나쁘고 자책도 하지만, 자고 나면 괜찮다. 나이가 드니 조금은 무뎌지는 것 같다.”
두 기사는 1973년 제1회 백남배 본선에서 처음 만난 뒤 42년 동안 370차례나 싸웠다. 유례없는 기록이다. 서 9단 기준 119승 251패. 타이틀 매치에서만도 72차례나 격돌했다. 서 9단은 처절하게 깨졌지만 들풀처럼 다시 일어났다. 58번 준우승했고, 14번 우승했다. 그 때 서로 주고받은 상처 때문일까. 두 기사는 지금도 복기를 하지 않는다. 대국 땐 늘 날이 서 있다. 이번 왕중왕전도 그랬다. 서 9단의 휴대전화 진동이 울리자 조 9단이 이의를 제기했고, “2번 울려야 반칙패”라는 심판 설명이 나온 뒤 대국을 속개했다. 그에게 조훈현에 대해 물었다. “조 9단은 강자, 나는 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봉수 9단은 후배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바둑을 잘 두고 싶어서”일 것이다. 한국기원 제공
―요즘 국가대표 훈련실에 나와 어린 기사들에게 묻기도 한다는데….
“일주일에 두세 번 나온다. 어린 기사들이 바둑을 두고, 복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좋다. 지금도 잘 두고 싶다. 때론 잘 모르는 부분을 묻기도 한다. 누구에게든 모르는 것을 묻는 다는 게 내 신조다. 물론 어린 국가대표들은 부담스럽겠지만(웃음).”
―옛날과 요즘 바둑을 비교한다면….
“요즘 바둑이 더 재미있다. 옛날 바둑은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요즘은 정석도, 포석도, 이론도 없다. 창조적이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발상이 현대 바둑의 매력이다. 이론에 갇히면 그 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현대 바둑은 틀에 갇히지 않아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이세돌 9단의 바둑을 높이 평가했다.
“집단 훈련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된다. 중단기적으로는 중국과 해볼 만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요즘 중국의 바둑 인기는 이창호 붐이 일 때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하지만 중국 바둑 인구가 훨씬 더 많다. 우리도 하루속히 바둑의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서봉수는 요즘도 인터넷 바둑을 둔다. 그는 “속기 능력을 늘리기 위해 제한시간 10초 바둑을 주로 둔다. 질 때도 많다”고 말했다.
서봉수 9단이 8일 시니어클래식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조훈현 9단에 패한 직후 서둘러 국가대표연구실에 들어간 모습. 한국기원 사진담당 이시용 기자가 잡은 뒷모습. 승부사의 숙명, 그런 것을 생각나게 한다. 한국기원 제공
―바둑이 실전적인데….
“대방동에 살 무렵 기원에 살다시피 한 아버지(1급)를 모시러 갔다가 바둑을 배웠다. 중학교 2학년 때다. 아버지에게 지도 받은 적은 별로 기억이 없고, 1급을 두는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웠다. 이후 배문고 바둑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특별히 누구에겐가 배운 게 없이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실전적일 수밖에 없다. 정주영 회장이 장사를 하면서 실물 경제를 알아간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서봉수는 1972년 19세에 조남철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명인에 올랐다. 입단 1년 8개월만이었다. 우승상금 25만 원으로 전셋집을 늘렸다. 그는 “몇 년 뒤 200만 원으로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렸는데 굉장히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된장 바둑’ ‘야전사령관’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승부를 즐겼다. 중학교 때 바둑과 함께 당구도 배웠다. 입단 뒤에는 포커를 좋아했다. 패가 좋으면 싸우고 안 좋으면 접어 거의 잃지 않았다. 일부 아마추어는 상대의 패를 읽지도 않고 본인 생각만으로 승부를 하다 잃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는 “승부를 업으로 하다보니 결정적 순간에 절제하는 능력이 밴 때문인지 포커 승률도 높았다”고 했다. 그는 YMCA의 바둑 초청 모임에 갔다가 두 달 정도 왈츠를 배우기도 했다.
서봉수 9단은 각종 기전 예선에 참가하며 여전히 현역을 고집하는 승부사다. 그는 “바둑을 둔 것을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 한국기원 제공
서봉수는 승부 세계와는 달리 ‘세상 행마’에는 서툴렀다. 고수들은 명사들과 접바둑을 둘 때 이른바 ‘접대 바둑’을 둔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일이 드물었다. 상대의 대마를 잡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그는 “TV 명사 접바둑에서 너무 빨리 끝내 PD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을 맞췄다”고 털어놓았다.
요즘 “생활이 여유롭지는 않다던데 바둑 둔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좋아하던 것이라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며 “이 나이에 국가대표들의 바둑을 보러 안양서 일주일에 두세 번 오는 게 바둑이 좋지 않고서 가능한 일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지금까지 공식 대국이 2501국이다. 가장 기억나는 대국은….
“제2회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했던 때가 가장 기억난다. 상금도 40만 달러였다.(웃음)”
환갑을 넘긴 그는 요즘도 각종 기전 예선의 단골 멤버다. 서봉수는 여전히 현역을 고집하는 승부사였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