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문화부 기자
50년 동안 신라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현역 최고참 최태환 작업반장과 수중 발굴의 산증인 박용기 잠수팀장을 인터뷰한 동아일보 18일자 기사를 보고 한 독자가 동아닷컴에 올린 인터넷 댓글이다.
경북 경주 월성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이들의 얘기를 묵묵히 들으며 기자는 깊은 존경심과 더불어 미안함을 느꼈다. 문화재를 담당하면서 발굴 성과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이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성의 심정으로 지면에 미처 쓰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본다.
그가 칠순까지 농기구를 든 것은 비단 땅을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발굴 보수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49년차 작업반장인 그가 받고 있는 일당은 고작 5만3000원. 주말을 제외하고 한 달 내내 일한다고 쳐도 월 110만 원가량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유구 훼손을 막기 위해 발굴을 중단하는 작업 특성상 100만 원을 손에 쥐지 못할 때도 많다. 게다가 장마나 혹한기에는 발굴을 진행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전수전 겪은 노장은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천마총과 대릉원 등 굵직한 유적을 발굴하던 1970년대가 그립다고만 했다. 대통령이 경주 발굴 현장을 수시로 찾던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새겨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경주시내 모든 음식점에서 외상이 가능할 정도로 끗발이 있었단다. 물론 수입도 지금보다 훨씬 ‘쏠쏠’했다. 그는 “죽기 전에 월성까지 발굴을 해봐서 여한이 없다”고 했다.
수중 발굴 현장도 상황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로 32년의 잠수 경력을 갖고 있는 박 팀장은 요즘도 간간이 부업을 뛴다. 파도가 높아져 수중 발굴을 할 수 없는 계절이 오면 산소통을 짊어지고 토목공사 현장을 찾는 것이다.
그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직원의 제안을 받고 2002년 이 일을 시작했지만, 보수가 적어 한동안 자신의 배로 조개잡이를 겸했다. 그러나 수중 발굴의 묘미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2004년에는 아예 배를 정리하고 발굴에 집중했다. ‘투잡’을 뛰며 힘들게 생활하는 데 후회는 없냐고 묻자 “바닷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도자기에 한번 반하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답했다.
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