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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14>소만(小滿)

입력 | 2015-05-20 03:00:00


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보리 이삭 누렇게 익고 초목이 무럭무럭 자라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다. ‘봄 끝물’, 여름 맏물. ‘베란다 볕’도 좋아 ‘미카엘라/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정답게 세례명을 부르는 걸 보니 미카엘라는 화자의 누이 같은 아내, ‘아버지’의 딸 같은 며느리.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아버지 ‘헤, 좋아라 애기처럼’ 웃으신단다. 육신도 정신도 ‘애기’가 된 연로하신 아버지,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몸을 씻는 게 영 내키지 않으셨을 테다. 그래 목욕하시자 할 때면 버럭 화를 내며 ‘땡깡’을 부리셨을 테다. 욕실에 모시는 일이 전쟁이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볕 좋은 베란다에서 ‘애기처럼’ ‘윤 교장선생’님, ‘따슨 물’에 몸 담그고 잠방잠방 물장난도 하며 웃으시네요. 미카엘라는 소만의 햇볕, ‘따슨’ 어머니의 손길로 노인의 몸을 어루만져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유일하게 남은 찬사가 ‘깔끔하다’일 날이 오리니. 방과 몸에서 나쁜 냄새라도 풍기면 가족의 천대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노인이 많다. 노인이 되면 여태 주인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이제 세입자가 된 듯 입지가 불안해진다. 그렇잖아도 어디에서고 존재감이 엷어지는데 가족조차 그가 없는 듯 있기를 원하기 쉽다. 다행히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같이 늙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전 노인들보다 외로움이 덜한 노년을 보낼 테다. 그런데 노인은 외로울 뿐 아니라 신체도 취약하다. 머지않은 그날에 대비해서 무슨 호신술을 연마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