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포니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의 ‘힐링’은 슬로건이라기보다는 산업이 되었다. 힐링 음식, 힐링 투어, 또 ‘힐링 캠프’라는 텔레비전 토크쇼는 높은 시청률로 지상파를 점유하고 있다. 과로를 유발하는 한국의 직장 환경과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도시로부터의 도피를 유혹했을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한발 물러나 잠시 쉬면서 반성하고 충전하기 위한 시간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나는 작금의 힐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참뜻을 잃는다면 대중화, 상업화에 매몰될 수 있다. 나는 한국 서점의 한 섹션이 힐링에 대한 책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과연 이 많은 책들이 독자의 인생을 장기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8월에는 시끄럽고 바쁜 서울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간 적이 있다. 친구가 전남의 청산도를 추천해줘 아무런 준비 없이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솔직히 청산도의 첫인상은 별로 안 좋았다. 오래된 부두와 낡은 낚시 가게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녹이 슨 사슬과 얽힌 그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뜨거운 햇살에 말린 생선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검푸른 바다의 어선들은 평화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걸어갔다. 부두를 떠나자 아주 조용하고 깨끗한 길이 나왔는데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동안 둘러보니 주변의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농장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니 고양이와 소가 나른하게 자고 있었다. 산뜻한 녹색이 여러 색깔로 빛나는 풀에서 나도 자고 싶었다. 그곳의 시간은 생기가 넘치고 꿈같았다.
몇 시간 후 태양은 점점 높이 올라가 내 팔을 태웠다. 배가 고파진 나는 식당을 찾았는데 문을 연 식당도 없었고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가방은 점점 무거워져서 등이 아팠다. 강한 햇빛에 계속 땀을 흘려서 나무 그늘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해변에 도착해 둑에 앉았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인생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심장박동이 느려졌고 바다에 있는 돌과 수면에 반짝이는 햇빛을 계속 응시했다. 파도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소리와 잠자리 날개의 파닥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바다였다.
얼마 후 휴대전화를 꺼냈는데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게임 해요?” 뒤돌아보니 자전거를 타고 온 열 살쯤 된 소년이 있었다. “아니. 나는 전화기에 게임이 없어.” “나는 게임을 좋아하는데….” “그래, 우리 게임하자. 물수제비뜰까?” “좋아요!”
나는 한 시간 정도 소년과 푸른 물에 돌을 던졌다. 물수제비에 빠져 배고픔과 햇볕에 탄 팔도 모두 잊을 정도였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 소년과 물수제비를 하는 동안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마치 내가 청산도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은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므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 단순한 경험으로 나는 여행이 힐링이나 인생의 길을 찾거나, 모험을 하는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어디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은 그 장소에 의미가 있다. 여행 간 곳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귀중한 경험이다.
※ 벤 포니 씨(28)는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한국에 왔으며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있다.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을 이끌어낸 고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증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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