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9〉노벨상 특별 수행원
이종찬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특별 수행원’에 포함되지 못하고 그 대신 노벨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환영 연회에 참석했다.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인지, 이종찬은 연회장에 나온 노벨평화상 메달 모양의 초콜릿을 잔뜩 모아 귀국했다. 그는 이 초콜릿들을 조만간 김대중재단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종찬 씨 제공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는 이듬해 안기부장으로 임명되었다. 5월 말경 김한정이 찾아왔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박사논문을 마무리해야겠다며 고별인사차 온 것이다.
나는 마침 수준 높은 국제정보 사업을 추진하는 태스크포스를 하나 구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손잡고 일을 한번 추진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과거 내가 중앙정보부 해외공작국 부국장으로 있을 때 부하였던 이종훈(육사 출신·정규과정 7기)을 팀장으로 앉혔다.
‘산림정책’ ‘조선사업’ ‘세종사업’ ‘피요르드사업’의 이름으로 그때까지 진행된 방해공작이 모두 들어있었다. 공작에 가담했던 직원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바로 내가 태스크포스 팀장으로 발탁한 이종훈과 노르웨이에서 말레이시아 파견관으로 전보된 최종흡이 거기에 해당됐다. 나는 몇 사람과 의논하였다. 퇴직시켜야 한다는 사람이 다수였지만 라종일 차장은 반대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면 처음부터 그 약속의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한정이 나에게 “방해공작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노르웨이를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다녀오더니 이렇게 보고했다.
“지금 밖에서 해외 동포들이 각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반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잡음이 생겨서 오히려 노벨상 추진에 차질을 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담해 나가야겠습니다.”
“정보기관에서 추진하면 후에 소문이 좋지 않을 터인데 괜찮겠소?”
김대중을 세일즈하기 위해 우선 ‘옥중서신’을 번역하기로 했다. 특히 서구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으로 믿었다. 예산 약 10만 달러는 김홍일 의원이 자청하여 마련하기로 했다.
다음은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있지만 너무 방대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를 재단에서 분리하여 활동 주체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한정을 FDL-AP의 사무차장으로 내보냈다.
시작은 좋았다. 다음 달 ‘1999년 미얀마 민주화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미얀마 망명정부 측 인사뿐 아니라 특히 노르웨이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노르웨이에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노르웨이를 방문하였다. 박경태 대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지금 이야기지만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에 가장 큰 공로자라 한다면 나는 박 대사를 꼽고 싶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고 수상식장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한 이후 박 대사로부터 북유럽의 전반적인 여론이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한정도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돌아왔다. 노벨위원회의 예이르 루네스타 사무총장이 남북정상회담에 수행했던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해서, 예정에 없이 만났다는 것이다.
2000년 노벨평화상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나는 12월 10일 오슬로 시청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버드대에서 마지막 논문 발표회를 끝내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러나 청와대 발표에 의하면 민주화 과정에서 고난을 함께한 인사들로만 수행원단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실망하였다. 그때 스웨덴에서 한영우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수행원 명단에 당신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이오?”
“아, 이번에는 과거 고난을 받을 때의 동지들로만 구성했다고 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오. 정 그렇다면 내가 여기 노벨위원회 명의로 별도 초청장을 보내지요.”
노벨상 시상식은 장엄했다.
그런데 다음 날 ‘노벨상 특별 수행원’들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나 한승헌 전 감사원장 같은 분은 당연히 이해하겠지만, 환경운동가 최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 총선시민연대 대표로 있으면서 마지막 순간 나와 김상현 의원을 낙선운동 대상 명단에 넣었다. 다른 시민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두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단의 일원이 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자리에 왜 있어야 하나?”
나는 더 이상 체재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여장을 쌌다. 김한정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이 너무 미안했던지 대통령 면담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고사했다.
▼ 만델라 측 “YS때는 100만달러 불렀는데…” ▼
마지막 승부수, 만델라 초빙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는 1999년 10월 ‘새천년을 위한 민주주의와 평화의 비전’을 주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뭐랄까, ‘새천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겨냥한 마지막 승부수였다. 적어도 이종찬에게는 그랬다. 4개월 전 국정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종찬은 FDL-AP 고문 겸 이사로 취임해 노벨상에 전념하고 있었다.
당시 FDL-AP 이사장은 김영삼 정부 초대 외무장관을 지낸 한승주 고려대 교수. 이종찬은 한승주와 ‘각 대륙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을 초청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인물은 역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대외 담당 보좌역이던 최규선이 만델라 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 부부를 초청해 ‘DJ=한국의 만델라’라는 이미지를 뿌리기도 했지만, 역시 본인 초청은 어려웠다.
만델라는 “DJ는 나의 친구다. 한승주 이사장이 오면 구체적인 (방한) 일정을 협의하겠다”면서도 확답을 주지 않았다.
FDL-AP는 현지 공관장(박원화 대사)을 통해 “방한하면 ‘만델라 기금(Mandela Foundation)에 20만 달러를 기증할 의향”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대사는 “(만델라 측이) 과거 김영삼 대통령이 100만 달러를 기증한다고 했을 때도 못 갔다면서 은근히 증액을 기대하고 있다”고 보고해왔다.
이종찬이 당초 한승주에게 얘기했던 한도는 50만 달러였다. 박 대사의 보고를 들은 이종찬은 급히 한승주를 찾아 협상 한도액을 100만 달러로 늘렸다. 하지만 남아공 현지의 우리 기업인들은 “최소한 그 두 배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 한승주는 그런 식의 일 처리에 불만을 표시했다. 다시 이종찬이 나섰다.
FDL-AP가 150만 달러를 준비하고, 남아공 현지 기업인들이 같은 액수의 매칭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문제는 150만 달러를 어떻게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전직 국정원장인 이종찬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외부에 잘못 알려지면 명색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민주주의 대회 준비에 한국의 정보기관이 개입한 셈이 되고 만다.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이종찬의 기억. “박권상 KBS 사장과 개인적으로 의논을 많이 했는데 마침 박 사장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놨습니다. 평화콘서트를 KBS홀에서 갖고 입장료를 팔아서 만델라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박 사장은 또 과거 군사정권 시절 DJ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호남 출신 기업인 몇 사람이 입장권 판매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줬습니다.”
그러나 막상 회의 직전 만델라 방한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
김창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