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닫는 가계]
《 #1 중견 건설사에 다니는 이모 차장(47)은 지난해 이직하면서 연봉이 8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랐지만, 새로 가입한 적금과 펀드에 돈을 부을 뿐, 지출을 추가로 늘리진 않았다. 이 차장은 “노후 준비를 못 한 선배들이 대책 없이 퇴직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 기초생활수급자인 일용직 근로자 최모 씨(43)는 지난해부터 어머니 앞으로 기초연금 20만 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집주인 요구로 매달 월세를 5만 원씩 올려 준 데다 담뱃값이 인상되고 병원비가 늘어나 형편이 오히려 나빠졌다. 최 씨는 “물가가 제자리이고 세금을 돌려준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하소연했다. 》
○ “미래가 두렵다” 지갑 닫은 가계
최근의 소비 감소는 단순히 단기적 경제 위기에 따른 현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 위축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업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 보유를 확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가계에까지 퍼진 셈이다. 3개월간의 가계 흑자액이 101만5000원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 100만 원을 돌파한 게 바로 이런 이유다. 가구당 처분 가능 소득(366만8400원)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늘었는데도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의류·신발(―5.3%), 오락·문화(―0.1%) 등의 지출은 오히려 감소했다.
소득 수준 하위 20%인 1분위 계층의 소득이 7.6%나 늘어 소득 수준 격차가 줄었지만 큰 의미를 두긴 어렵다. 통계청 관계자는 “기초연금 지급, 노인 일자리 사업 확대 등으로 소득이 6만 원가량 증가한 영향이 크다”며 “소득과 소비 모두 워낙 규모가 작아 금액이 조금만 늘어도 증가 폭이 커지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 고령화로 지갑 닫는 일본 전철 밟나
문제는 이 같은 가계소비 침체가 좀처럼 나아질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후를 의식해 지갑을 닫는 점이 눈에 띈다.
통계청에 따르면 가구주가 60세 이상인 가구의 올 1분기 평균 소비성향은 68.3%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았던 지난해 3분기(7∼9월)의 67.3% 이후 두 번째로 낮았다.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공적연금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고령층이 빠르게 증가해서다. 서운주 통계청 복지통계과장은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들이 지출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젊은층도 노후를 대비해 씀씀이를 줄이는 추세”라고 말했다.
결국 ‘소비 위축→내수 침체→성장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정부와 통화 당국이 확장적 재정·통화정책 강화를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결국 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려면 정책 당국의 신호가 중요하다”며 “내수의 핵심인 소비가 살아날 수 있도록 당국이 재정과 통화 정책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훈 january@donga.com / 세종=손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