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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노후 대비”… 월급 올라도 적금-펀드에 차곡차곡

입력 | 2015-05-23 03:00:00

[지갑 닫는 가계]




《 #1 중견 건설사에 다니는 이모 차장(47)은 지난해 이직하면서 연봉이 8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랐지만, 새로 가입한 적금과 펀드에 돈을 부을 뿐, 지출을 추가로 늘리진 않았다. 이 차장은 “노후 준비를 못 한 선배들이 대책 없이 퇴직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 기초생활수급자인 일용직 근로자 최모 씨(43)는 지난해부터 어머니 앞으로 기초연금 20만 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집주인 요구로 매달 월세를 5만 원씩 올려 준 데다 담뱃값이 인상되고 병원비가 늘어나 형편이 오히려 나빠졌다. 최 씨는 “물가가 제자리이고 세금을 돌려준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하소연했다. 》
  

통계청이 22일 내놓은 ‘1분기(1∼3월) 가계 동향’은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 진입을 앞둔 불안한 상황에서 가계가 허리띠를 얼마나 바싹 졸라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부동산 등 자산 가격 하락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고 저성장이 고착화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제 주체들의 심리가 확산되면서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나타난 초기 디플레이션 소비 위축이 한국에서 현실화된 게 아니냐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미래가 두렵다” 지갑 닫은 가계

올 1분기 가계 동향에 따르면 가구당 평균 소비지출(265만3000원)은 지난해 같은 기간(265만4000원)과 비슷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올해는 개인의 선택으로 쓸 수 있는 소비 여유가 오히려 줄었다. 유가 하락으로 교통비 지출이 작년 동기 대비 4.5% 감소하고 ‘이동통신 단말장치 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 도입 등의 영향으로 통신비 지출이 8.4% 감소했지만 이렇게 아낀 돈의 상당액이 주거비(15.1% 인상), 주류 및 담배(6.1%) 지출에 들어가 소비 여력이 살아나지 못했다.

최근의 소비 감소는 단순히 단기적 경제 위기에 따른 현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 위축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업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 보유를 확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가계에까지 퍼진 셈이다. 3개월간의 가계 흑자액이 101만5000원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 100만 원을 돌파한 게 바로 이런 이유다. 가구당 처분 가능 소득(366만8400원)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늘었는데도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의류·신발(―5.3%), 오락·문화(―0.1%) 등의 지출은 오히려 감소했다.

소득 수준 하위 20%인 1분위 계층의 소득이 7.6%나 늘어 소득 수준 격차가 줄었지만 큰 의미를 두긴 어렵다. 통계청 관계자는 “기초연금 지급, 노인 일자리 사업 확대 등으로 소득이 6만 원가량 증가한 영향이 크다”며 “소득과 소비 모두 워낙 규모가 작아 금액이 조금만 늘어도 증가 폭이 커지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 고령화로 지갑 닫는 일본 전철 밟나


문제는 이 같은 가계소비 침체가 좀처럼 나아질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후를 의식해 지갑을 닫는 점이 눈에 띈다.

통계청에 따르면 가구주가 60세 이상인 가구의 올 1분기 평균 소비성향은 68.3%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았던 지난해 3분기(7∼9월)의 67.3% 이후 두 번째로 낮았다.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공적연금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고령층이 빠르게 증가해서다. 서운주 통계청 복지통계과장은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들이 지출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젊은층도 노후를 대비해 씀씀이를 줄이는 추세”라고 말했다.

고소득층이 지갑을 닫고 있는 점도 정부의 내수 진작 대책을 무색하게 만든다.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5분위 가구는 소득이 2.4% 증가했는데도 지출은 0.1% 늘리는 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내수를 살려 경기를 회복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이 주요 교역국의 성장세 둔화와 엔화 약세 등에 따른 수출 경쟁력 저하로 인해 적잖이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소비 위축으로 내수마저 살아나지 않는다면 돌파구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소비 위축→내수 침체→성장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정부와 통화 당국이 확장적 재정·통화정책 강화를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결국 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려면 정책 당국의 신호가 중요하다”며 “내수의 핵심인 소비가 살아날 수 있도록 당국이 재정과 통화 정책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훈 january@donga.com / 세종=손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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