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과, 끝끝내 덜 된 집
제 2과, 단번에 깨친 듯 거침없는 바람
제 3과, 흥에 겨워 허구한 날 노래하는 나무
이 세 귀신(鬼神) 사이에 끼어보려고
반평생 기웃거리며 살았는데
끝끝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다가
한숨 한 번 몰아서 이렇게 써봐야지.
제 4과, 못 지킨 빛 한 줄기.
화자가 번호 붙여 또박또박 불러내는 ‘끝끝내 덜 된 집’ ‘단번에 깨친 듯 거침없는 바람’ ‘흥에 겨워 허구한 날 노래하는 나무’가 차례대로 비유의 옷을 벗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다가온다. 그러한 시들, 그러한 시를 쓰는 시인들의 모습으로. 많은 시인들이 추구하고 선망할 ‘세 귀신’이다. 화자도 이 ‘세 귀신(鬼神) 사이에 끼어보려고/반평생 기웃거리며 살았는데/끝끝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단다. 어떤 소설의 한 구절이 설핏 떠오른다. 예술가의 이루지 못한 꿈처럼 스산한 건 없다던가, 가슴 아픈 건 없다던가. 그러나 ‘제 4과’! 시인으로서 이루지 못한 그것들보다 더 안타까운 건 ‘못 지킨 빛 한 줄기’란다. 이 시에서 ‘귀신’은 ‘어떤 일을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사람을 호리는 삿되고 헛된 망령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끝내 ‘시의 귀신’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그리고 귀신을 좇다가 생명의 근원인 ‘빛’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런 것 같다는 자괴감의 토로가 ‘단번에 깨친 듯 거침없는 바람’처럼 양명하고 상쾌하다.
그런데 이 시의 ‘과’는 어디서 나온 걸까? 한 선생님과 통화를 하다가 이 시를 읽어드리니 불교의 ‘4과’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윤회, 즉 3생(전생 현생 내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다시는 태어나서 번뇌하지 않는 최고 경지라고. 그 ‘과’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과’와 같은 한자란다. ‘인과응보가 정말 있다면 왜 악한 사람이 잘 먹고 잘살다 가고 착한 사람이 험하게 살다 갈까’, 참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의문이다. 이를 단번에 해소시키는 내세나 천국이어라. 부처님과 하느님의 장부에는 우리의 삶이 빠짐없이 적힌다지. 하지만 그 결산은 먼먼 나중 일, 불교의 생명이라는 ‘자비’가 세상에 충만하기를!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