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유골과 수북한 동물 뼈들은 희생 제물?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정원 내 우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아이 유골.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여러 유적을 조사했지만 그때만큼 두렵고 긴장한 적은 없었다. 처음 우물 입구가 발견됐을 때만 해도 깊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여러 명의 조사원들이 함께 파내려 갔다. 하지만 6m 이상을 파도 바닥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우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아무도 선뜻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발굴은 중단됐다.
발굴을 책임진 필자는 며칠간 고민하다가 발굴을 계속하기로 했다. 우물 붕괴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미지의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는 학문적 호기심이 더 컸다. 발굴이 진전되면서 7.5m 깊이에서 기와 조각 1점을 수습했는데 ‘남궁지인(南宮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역사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던 ‘남궁’이라는 궁궐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것. 어수선하던 발굴 현장에 새로운 기대감이 넘쳐났다. 그런데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발굴을 할수록 많은 동물 뼈와 유물이 뒤섞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분석 결과 개 4마리, 고양이 5마리, 멧돼지, 소, 사슴, 고라니, 말, 쥐, 두더지, 토끼, 까마귀, 오리, 꿩, 매, 참새, 가오리, 상어, 고등어, 도미, 대구, 민어, 광어, 복어, 숭어, 붕어 등 온갖 동물의 뼈가 나왔다. 9m 깊이에서는 두레박도 나왔다.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고 안에서 함께 출토된 나무 참빗 역시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우물 바닥은 지표로부터 약 11m 깊이에서 확인됐다.
발굴은 끝났지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왜 신라의 우물 속에 아이의 유골과 수많은 동물 뼈가 함께 있는 걸까. 그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수백 개의 우물 가운데 인골이 출토된 사례는 오직 경주박물관 내 우물뿐이다. 처음에는 우물 주변에서 놀던 아이가 실족해 추락하거나 돌림병으로 죽은 아이를 버렸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하지만 ‘에밀레종 전설’처럼 아이를 제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봤다.
9세기 무렵 신라 궁궐에서 무언가 절박한 사정이 생겼고, 신라의 땅과 바다에 사는 동물들을 모두 잡아 제물로 바치고 그 위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까지 공양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하다. 옛 역사를 살피다 보면 현대의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미스터리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