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김려령 지음/216쪽·1만2000원·창비
백년해로를 목표로 하는 결혼이 스마트폰 약정기간 관계처럼 바뀌면서 회원들은 탄력적으로 배우자를 바꿔가며 즐기며 산다. 필드와이프도 상대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변태적일 경우 3번에 한해 결혼을 중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매끈해 보이는 계약 관계도 출산과 섹스, 배우자에 대한 간섭 충동 때문에 계속 삐걱거린다. 장점을 오롯이 누리는 건 돈을 지불한 구매자뿐이다.
소설은 노인지가 네 번째 결혼을 끝낸 시점에서 시작한다. 노인지는 “결혼반지가 네 개나 있는데도 남자를 모르겠다. 평생 배출해내는 정자 수만큼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알려고 들면 더 모르겠고, 포기하면 그제야 뭔가 보이는 것 같다가, 다시 시작하려면 혼란스럽다”고 토로한다.
소설 말미에 그간의 사정이 드러난다. 대학 시절 노인지는 게이였던 남자를 사랑했다. 남자가 양성애를 택하며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뻔했다. 하지만 노인지의 어머니에게 둘의 사랑은 ‘더러운 게 묻을까 봐 손도 내밀고 싶지 않은 진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남들이 모두 예스 하는데 왜 나만 노를 해야 하는지 이해시키기 어려웠다”란 노인지의 고백이 오래 남는다. ‘노’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결혼과 사랑의 기준이란 진창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베스트셀러 성장소설 ‘완득이’ 등을 쓴 저자가 그 관습을 향해 독한 어퍼컷을 날렸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