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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결혼·사랑, 다섯 번 결혼하고도 모르겠어…

입력 | 2015-05-30 03:00:00

◇트렁크/김려령 지음/216쪽·1만2000원·창비




스물아홉 살 주인공 ‘노인지’는 한 결혼정보업체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의 ‘필드와이프(field wife)’다. NM의 설립 취지는 ‘결혼제도 부적응자, 자발적 결혼 설계자, 통념적 차원에서 결혼이 불가능한 자들을 위한 합리적 결혼 시스템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목표’다. 필드와이프는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 성사 자금을 지불하는 회원과 일정 기간 ‘기간제 배우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남편 역할을 하는 필드허즈번드도 있다.

백년해로를 목표로 하는 결혼이 스마트폰 약정기간 관계처럼 바뀌면서 회원들은 탄력적으로 배우자를 바꿔가며 즐기며 산다. 필드와이프도 상대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변태적일 경우 3번에 한해 결혼을 중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매끈해 보이는 계약 관계도 출산과 섹스, 배우자에 대한 간섭 충동 때문에 계속 삐걱거린다. 장점을 오롯이 누리는 건 돈을 지불한 구매자뿐이다.

소설은 노인지가 네 번째 결혼을 끝낸 시점에서 시작한다. 노인지는 “결혼반지가 네 개나 있는데도 남자를 모르겠다. 평생 배출해내는 정자 수만큼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알려고 들면 더 모르겠고, 포기하면 그제야 뭔가 보이는 것 같다가, 다시 시작하려면 혼란스럽다”고 토로한다.

그런 노인지 앞에 여러 선택지가 등장한다. 소개팅으로 만난 잘생겼지만 스토커 기질이 다분한 남자, 오랜 기간 자신을 사랑해 왔음을 고백하는 동성 친구, 다시 결혼을 신청해온 네 번째 결혼 상대까지. 다섯 번 결혼을 하고 손가락에 결혼반지 다섯 개를 끼고서도 결혼과 사랑 앞에서 그는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소설 말미에 그간의 사정이 드러난다. 대학 시절 노인지는 게이였던 남자를 사랑했다. 남자가 양성애를 택하며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뻔했다. 하지만 노인지의 어머니에게 둘의 사랑은 ‘더러운 게 묻을까 봐 손도 내밀고 싶지 않은 진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남들이 모두 예스 하는데 왜 나만 노를 해야 하는지 이해시키기 어려웠다”란 노인지의 고백이 오래 남는다. ‘노’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결혼과 사랑의 기준이란 진창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베스트셀러 성장소설 ‘완득이’ 등을 쓴 저자가 그 관습을 향해 독한 어퍼컷을 날렸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