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시론/최진우]‘과거의 타자화’를 촉구한다

입력 | 2015-06-01 03:00:00


최진우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

얼마 전 일본 삿포로에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일관계의 지난 50년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50년을 조망하는 자리였다. 최악의 경색 국면에 처한 작금의 한일관계에 대한 양측 참석자들의 진단과 처방에는 분명 시각차와 온도차가 있었다. 다만 모두가 공감한 것은 양국관계가 개선돼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위안부 문제, 징용시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 후쿠시마 인근 해역 수산물 수입 문제 등 여러 현안을 두고 양국 정부가 사사건건 정면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건 정부 간 대결 구도는 시민사회 차원으로 빠르게 확산돼 일본에서는 한류의 열기가 식어가고 혐한류의 냉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사이버상에서 막말 공방의 수위는 높아만 가고 한국을 찾는 일본 관광객, 교환학생, 유학생 수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환율효과도 있겠지만 과거사 공방의 탓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일부 언론의 선동적 보도 또한 양국관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개선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에 나선 일본국제교류기금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전 주한 일본대사) 고문의 발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의 가장 중요한 의의를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는 물론이요 국민에게 사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었다. 군국주의 과거로 인해 고통을 받은 일본 국민을 위로하고 솔직하게 과오를 인정했으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일본의 ‘자신과의 화해’라고 표현했다.

오구라 고문의 해석대로라면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는 진정 크다. 일본이 과거를 타자화(他者化)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화란 무엇인가? 모든 공동체는 구성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정체성은 구성원 사이의 동질성과 비구성원과의 차별성에 대한 중층적 인식에 근거한다. 즉 ‘우리’의 존재는 우리와는 다른 타자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의의를 갖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종종 타자는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 비도덕적 존재로 규정된다. 이것이 타자화다. 일본이 19세기 말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아이누족을 강제 이주시키고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 바로 타자화다. 열등하거나 비도덕적인 존재로 규정하기에 탄압하고 배척하면서도 죄책감이 없다. 가장 극단적인 타자화의 예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다. 민족주의가 위험한 것은 민족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나 소수민족을 거칠게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화의 대상이 과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오로 얼룩진 과거를 타자화하는 것은 곧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유럽이 그랬다. 유럽의 통합은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국가들 간의 반목과 각축,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된 과거를 타자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얼마 전 일본의 대표적 역사연구단체들이 일본 정부의 위안부 왜곡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며칠 전에는 전 세계 저명 역사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아베 정부의 과거사 왜곡 행태를 성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일본 언론 또한 정부 입장을 벗어나는 것을 꺼려해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본 정부와 언론이 ‘과거의 타자화’를 멈추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타자화를 멈추는 순간 동북아 국가들은 서로를 타자화하게 된다. 악화일로의 한일 국민감정이 그 예다. 한일관계의 개선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이제 일본 정부와 언론이 다시 ‘과거의 타자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최진우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