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유력층 유골함 찾은 고교생, 현재 박물관장 활약
박방룡 부산박물관 관장이 고교 시절인 1973년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서 발견한 ‘당삼채 골호’.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보물에 대한 욕심이 날 법도 한데 그는 유물을 들고 곧장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경주박물관학교 출신인 그는 유물 발견 이후의 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 당시 경주박물관장은 당삼채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국립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즉각 현장으로 달려가 학술조사를 진행하고 통일신라 화장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땅속에 석함을 묻고 그곳에 뼛가루를 담은 장골기를 봉납했다는 결론을 얻었는데 뚜껑으로 사용된 동제 접시는 신라시대 때 제작된 것이었다. 만약 도굴꾼의 눈에 먼저 띄었다면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유물의 가치가 높은 것은 바로 신라인이 만든 화장묘에서 발굴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여전히 수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지만 언제, 누가, 왜 땅속에 묻은 것인지 대체로 알려져 있다. 출토 정보가 없는 골동품으로 팔렸다면 경매 시장에서 흔히 살 수 있는 당삼채의 하나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근래까지 신라유적 여러 곳에서 삼채가 출토됐지만 조양동 삼채에 버금가는 명품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같은 시기 발해와 일본에서 각기 삼채가 제작됐음을 근거로 조양동 삼채를 신라 삼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당으로부터 수입한 물건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룬다. 당삼채로 볼 경우 어떤 과정을 거쳐 경주로 전해졌을지 궁금하다. 신라와 당의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두 나라는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동맹국이었지만 곧 적국이 돼 나당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곧 개선돼 신라는 당의 제도나 문물을 적극 수용했다. 물론 신라는 당뿐만 아니라 주변 각국을 비롯해 이슬람권까지 다양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통일신라 곳곳에서 발견되는 외래 유물은 이런 신라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에서 수입한 고급 삼채 속에 들어 있는 뼛가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성덕왕릉, 효소왕릉 등 신라 왕릉에서 불과 5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 당시로서는 최고급품이던 삼채를 장골기로 사용한 점, 석함까지 갖춘 사실 등을 감안할 때 왕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여러 왕들 가운데 화장을 선택한 사람은 문무왕과 원성왕, 진성여왕 등 몇 명에 불과하다. 이 중 원성왕을 유력한 후보로 보거나 왕이 아닌 진골 귀족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향후 추가 연구를 통해 조양동 골호의 주인공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