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는 한국을 떠나 먹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지는, 한국의 대표 음식이다. 동아일보DB
김성규 셰프
뒤늦게 2년제 대학 조리학과에 들어간 그는 영어가 향후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휴학하고 필리핀과 호주에서 어학연수도 했다. 28세의 나이인 2009년 여름 그는 서울의 큰 호텔 주방에서 견습 요리사로 주방 경력을 시작했고 곧 정직원으로 채용돼 한식부 주방에서 일했다.
호텔 총주방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그는 2011년 승부수를 띄웠다. ‘한식 요리사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싱가포르로 건너간 것이다. 싱가포르는 특급 호텔이 많고 영어가 4개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영어권 나라여서 호텔 관련 학과를 졸업한 한국인들이 경력 관리를 위해 선호하는 나라다. 어느 호텔을 가든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쉽게 볼 수 있다.
호텔 주방의 노동 강도는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올 만큼 만만치가 않다. 내가 그와 함께 일한 메인 키친은 행사 음식을 주로 책임지는데 많게는 1000명분의 코스 요리도 준비한다. 요리사는 많아야 7, 8명이다. 한꺼번에 음식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음식 서빙 직전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요리사들은 하루 평균 12시간 노동은 예사고, 큰 행사라도 있으면 14시간도 일한다. 그는 손이 빠른 만큼 판단도 빨랐다. 그가 주방에 있을 때 나는 든든했다.
‘빡’은 말하자면 나의 요리 스승 중 한 명이다. 내가 어떤 음식의 레시피가 궁금해 물어보면 그는 “형 생각대로 먼저 해봐요. 뭐든 직접 해봐야 자기 것이 되니까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고는 내가 제대로 못 하고 쩔쩔매면 바람처럼 나타나 후다닥 시연을 해 보이고는 자기 맡은 일을 찾아 사라졌다.
싱가포르에서 먹은 최고의 음식은 그가 만든 김치찌개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싸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집에서 끓인 김치찌개와 밥을 검정 비닐에 담아 방문했다. 떠나는 사람에게 음식을 해 주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구도 그릇도 다 처분한 상태여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일회용 식기에 담아 먹은 그의 찌개는 푹 끓인 김치가 부드러웠고, 돼지고기와 기막히게 잘 어울렸으며, 또 달콤했다.
한창 열애 중인 그는 한 달 전쯤 휴가를 얻어 한국에 들어왔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여자 친구와 함께 내가 일하는 푸드카를 찾아왔다. 그의 집인 인천에서 대중교통으로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다. 이번엔 내가 그에게 직접 만든 햄버거를 대접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그는 돈을 내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그는 햄버거에 곁들인 고추 피클 맛이 너무 강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여자 친구는 군말 없이 맛있게 먹었다.
여자 친구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려는 그는 싱가포르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그가 받는 월급은 1700싱가포르 달러(약 138만 원)에 불과하고 싱가포르는 물가가 비싸도 너무 비싼 나라다.
그가 이젠 호텔 총주방장의 꿈을 버렸으며 여자 친구와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작은 음식점을 열어 볼까 한다는 소식을 며칠 전 문자 메시지로 전해 왔다. 그의, 그리고 세상 모든 직업 요리사들의 건투를 빈다.
※필자(44)는 싱가포르 요리학교 샤텍에 유학 뒤 그곳 리츠칼턴호텔에서 일했다. 그전 14년간 동아일보 기자였다. 경기 남양주에서 푸드카 ‘쏠트앤페퍼’를 운영 중이다.
김성규 셰프 zeitpull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