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오피니언팀장
일본이라고 사정이 크게 낫지는 않았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외지에서 온 한국인들을 차별했다. ‘조센진’이라는 말에 깔본다는 의미가 따라붙었다.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사판 막노동이 거의 전부였다. 아니면 방적공장 직공이나 엿장수 고물상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 역시 얼음 장사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간토(關東)지방의 명문으로 꼽히는 사쿠신학원고교를 나와 사립 명문대인 메이지대 법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그해 일본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일본생명에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 현실로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가 취소됐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창업에 나섰다. 화순(和順)과 광주(光州)의 첫 글자를 딴 와코(和光)물산을 차려 키워냈다.
장학회 이사장인 이 씨는 어머니 조행자 여사가 4월 장학금 수여식에서 한 말을 들려줬다.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미대에 가고 싶었다. 결혼할 때 여유가 생기면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3남매를 키우며 부업도 하면서 무사시노(武藏野)미대에 합격했다. 남편은 “올해는 힘드니 내년에 공부하자”고 했다. 이듬해 다시 붙었지만 또 입학하지 못했다. 그 다음 해에도 합격했지만 가지 못했다. 결국 체념했다.’ 일본 최고 사립미대에 3년 연속 합격하고도 입학하지 못한 어머니는 남몰래 부엌에서 울었다. 초등학생이던 장남이 보다 못해 “제가 커서 어머니를 대학에 보내드릴게요”라고 위로했다. 아내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수 없는데도 학봉은 장학금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학봉장학회 기금은 2013년 32억 원을 넘었다. 조 여사가 앞장서 남편의 한국 내 전 재산을 기증한 결과다. 30억 원 목표를 7년 앞당겼다. 기금 규모가 수백억, 수천억 원에 이르는 장학재단에 견줘보면 학봉장학회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학봉처럼 자기 가족의 순서를 뒤로 미루면서까지 남을 도운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이사장은 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대 법대·법학전문대학원과 함께 제정한 학봉상(law.snu.ac.kr/hb_award) 첫 수상자를 내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함께 비춰 보는 내용의 논문과 연구계획을 공모해 제1회 수상자를 선정한다. 올해가 광복 70주년과 한일 수교 50주년인 점을 감안했다. 서울대 법대가 일본에서 일본어 논문을 공모한다는 것도 처음 듣는다.
부친이 어려운 속에서도 조국의 미래를 챙겼다면 장남은 한발 더 나아가 한일의 선린관계 회복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한다. 한일관계가 오랫동안 경색돼 있지만 어려웠던 과거를 가슴에 담은 이들의 작은 노력이 있는 한 양국의 민간 유대는 좀처럼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