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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 그래서 더 빛난 ‘400홈런’

입력 | 2015-06-05 03:00:00

‘배려와 성실의 아이콘’ 이승엽




한국 최고의 야구 스타지만 이승엽은 항상 자신을 낮춘다. 3일 400호 홈런 기록을 축하해주고 있는 후배 롯데의 최준석과 악수를 나누면서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한 이승엽. 포항=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2011년 1월 어느 날. 이승엽(39·삼성)은 삼성의 2군 훈련장 경북 경산볼파크에서 방망이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당시 이승엽이 처한 상황 역시 한겨울이었다. 이승엽은 부진 끝에 7년간 몸담았던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에서 방출됐다. 곧바로 오릭스와 계약했지만 ‘국민타자’였던 그의 자존심은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훈련을 마친 이승엽은 “밖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따뜻한 실내를 마다하고 실외 인터뷰라니. 이승엽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추운 데서 해야 빨리 끝낼 것 같아서요. 야구도 못했는데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승엽 정도 스타라면 인터뷰가 불편하면 안 하면 그만이다. 뭐라 할 사람도 없고, 뭐라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배려했다. 20년 가까이 이승엽을 취재하면서 그의 은근한 배려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에서 559개의 홈런(한국 400개, 일본 159개)을 친 그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상대의 실투를 쳤다”는 말이다. 3일 롯데 구승민을 상대로 개인 통산 400호 홈런을 쳤을 때도 “투수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투수가 실투했고, 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잘했다기보다 상대 실수 덕분에 홈런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엽이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뛰어난 실력 못지않은 훌륭한 인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또 재능을 타고났지만 노력까지 더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국내에도 이승엽만큼 열심히 하는 선수는 꽤 많다. 이승엽이 다른 점은 ‘최고의 위치’에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승엽은 1999년 54홈런을 치고도 타격 폼을 수정했다. 그리고 결국 2003년에 당시로선 한 시즌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인 56홈런을 쳤다. 이제 40대가 되는 요즘에도 그는 매 타석을 마지막 타석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준비한다.

이승엽은 개인 통산 400홈런을 친 뒤 “좋은 스승들을 많이 만난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투수로 입단한 그를 타자로 만든 백인천 전 감독과 박승호 코치(현 NC), 홈런 타자로 키워준 박흥식 코치(현 KIA), 일본 시절 그의 부활을 이끈 김성근 감독(현 한화) 등이다. 이들은 모두 “이승엽이 된 사람이자 선수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2011시즌을 마친 뒤 그가 삼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류중일 감독이 그의 인성을 높이 평가해서다. 류 감독은 “실력도 통할 수 있다고 봤지만 이승엽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배들에게는 큰 귀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오릭스를 떠날 때 오카다 아키노부 당시 감독도 “후배들이 보고 배울 게 많은 선수인데 보내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2012년 삼성에 합류한 이승엽은 팀의 4년 연속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야구계에선 모질고 독한 선수가 야구를 잘한다는 통념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2008승을 거둔 리오 듀로셔 감독(1905∼1991)은 “사람 좋으면 꼴찌다(Nice guys finish last)”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착한 선수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승엽의 겸손은 어쩌면 야구라는 종목의 본질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400개의 홈런을 치는 동안 그는 1128번의 삼진을 당했다. 통산 타율 0.301은 훌륭한 성적이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10번 중 7번은 안타를 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번이라도 더 실패를 줄이기 위해 그는 오늘도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라운드에 선 그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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